김용철 변호사의 삼성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 폭로와 관련, 여야 의원들이 국정감사에서 삼성그룹과 주거래은행인 우리은행의 공모 의혹을 잇따라 제기했다.
지난달 29일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옛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출신의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그룹이 자신도 모르는 차명 계좌 4개를 우리은행 등에 개설해 50억 가량의 비자금을 조성해 관리했다고 폭로했다. 김 변호사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은행은 명백히 금융실명제법을 위반한 셈이다.
2일 국회 재경위 국감에서 대통합민주신당 이목희 의원은 “실명제법을 위반하면서까지 계좌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해당지점장 선에서 결정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고 당시 우리은행장이었던 황영기씨가 개입됐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라고 주장했다. 황영기 전 우리은행장은 삼성증권 사장 출신이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도 “은행의 공모 없이는 계좌 개설과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라면서 “우리은행이 공적 관리 은행이라는 점에서 재경부와 우리은행, 삼성과 참여정부의 관계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공모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음에도 당사자인 우리은행은 사실관계 조사 조차 꺼리는 등 석연치 않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우리은행은 “예금주 본인(김용철 변호사)의 동의 없이는 고객정보를 뒤져볼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김 변호사의 차명계좌 주장에 대한 자체 확인 작업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금융가에서는 우리은행의 미온적 태도는 삼성그룹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삼성그룹의 주거래은행인 우리은행은 서울 남대문로 삼성그룹 사옥에 별도 지점(삼성센터지점)을 개설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다.
이에 따라, 은행의 자체 조사에만 의존해선 안되고, 금융감독당국의 진상 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으나, 금융감독원도 나서기 꺼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1일 “(주거래은행인) 우리은행이 자체적으로 사실관계를 파악 중이어서 결과를 보고 대응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은행 측은 대외적으로 “조사를 안하고 있다”고 말하는데도, 금감원은 조사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서로 말이 엇갈리는 셈이다. 이와 관련, 금감원 관계자는 “우리은행으로부터 차명계좌 개설과 관련, 계좌개설에 필요한 형식적 요건은 갖춰져 있다는 1차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즉, 제3자가 본인 대신 계좌를 개설할 때 필요한 주민등록증 사본, 위임장 등이 갖춰져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계좌 개설에 필요한 대리인 위임장을 써 준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어, 김 변호사 주장이 사실이라면 ‘위조된 위임장’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문제의 차명계좌는 시크릿 뱅킹 서비스(secret banking service·예금주 본인만 거래내역을 볼 수 있게 하는 비밀 서비스)가 신청돼 있는데, 은행 규정상 이 서비스는 예금주 본인이 직접 신청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자신이 이런 서비스를 신청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비자금 계좌를 감추기 위해 삼성과 우리은행이 공모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