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르핀 분비되는 ‘즐거운 통증’… 점점 중독

    입력 : 2007.10.15 00:28

    한국인은 왜 매운맛에 집착하나?
    단맛도 나는 국산 고추 ‘더 매운맛 찾기’에 일조…
    고추, 壬亂이후 들어왔지만 18세기前엔 매운맛 안즐겨

    서울 창신동 ‘깃대봉 냉면’집은 혀에 불이 나도록 매운 냉면으로 열혈 팬을 거느린 식당이다. 메뉴판에는 ‘저희 비빔·물냉면은 맵습니다. 주문시 참고 바랍니다’란 글귀가 적혀 있다. 고추양념(다진양념)이 들어가는 양에 따라 ‘매운맛?보통?안 매운맛?하얀 맛’ 등 6단계로 구분되는데, ‘안 매운맛’ 역시 일반 냉면집 비빔냉면보다 훨씬 맵다. 조성미(44) 사장은 “내성이 생기는지 단골손님들이 더 맵게 해달라고 주문해서 1등급 높인 매운맛을 추가했다”고 말했다. 서울 선릉역 부근 ‘마담 밍’의 ‘짬뽕면’은 고춧가루를 넣어 끓인 국물에 고추기름을 뿌리고, 추가로 고추양념(다진양념)까지 낸다. 밥 때만 되면 손님들이 몰려든다.
    ▲ 호되게 맵기로 유명한 청양고추의 산지인 충남 청양군 비봉면 중묵리에서 한 농민이 고추를 수확해 세척하고 있다. /조선일보DB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14일 “임진왜란(1592) 이후 왜겨자란 이름으로 고추가 들어와 대중 사이에 퍼지긴 했지만, 고추로 김치를 담그기 시작한 18세기 이전에는 매운맛을 살짝 내는 정도였지 즐기지는 않았다”면서 “1670년쯤 쓰인 최초의 한글요리책 ‘음식디미방’에는 고추가 들어가는 음식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영실 숙명여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통각(痛覺·통증을 느끼는 감각)에 속하는 매운맛은 입안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질감에 때문에 점점 중독성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고추, 그 맵디매운 황홀’(뿌리와 이파리)의 저자 아말 나지는 심리학자들 연구를 인용, “고추 중독은 니코틴 중독과 원리가 흡사하다”고 분석했다. 그는 “롤러코스터처럼 통증을 느끼되 실제로 몸에 상처는 입지 않는 데서 오는 심리적 쾌감, 몸이 상처를 입었다고 판단한 뇌가 분비하는 엔도르핀(진통효과를 내는 자연물질)에 의해 더 매운 고추를 집어 들게 된다”고 말한다.

    한국 고추의 특성이 더 맵게 먹는 경향을 부른다는 설명도 있다. 농심 등 식품업계에서 일하며 고추를 연구해온 김진석씨는 “청양고추의 경우 매운맛 성분인 캡사이신은 미국 타바스코에 비해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당분은 2배나 더 들어 있어, ‘매콤하면서 단맛이 나는’ 특유의 맛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매운맛이 혀를 마비시켜 다채로운 음식 맛을 못 느끼게 한다’는 오래된 주장도 점점 힘을 잃고 있다. 영국의 인류학자 캐럴 파버 등 음식사가들은 “고추가 입안의 느낌을 더욱 좋게 하고 미각을 예민하게 함으로써 음식이 실제보다 더 맛도 좋고 향도 뛰어나다고 느끼게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으로 큰 변화나 위기가 있을 때 매운맛을 선호한다는 설도 있다. 김주현 책임연구원은 “임진왜란 무렵 들어와 실학파가 주도했던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외국 식재료인 고추가 서민들 식탁에 확고히 정착했다는 사실, IMF사태 이후 자극적인 음식이 늘었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뭔가 답답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매운맛을 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식품연구원 구경형 박사는 “캡사이신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 위점막을 오히려 보호한다는 논문도 나오고 있지만, 고추에는 캡사이신만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며 “매운맛 선호는 전통음식까지 점점 더 자극적이 돼 간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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