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노동신문은 최근 ‘〈랍북자결의안〉 미의회 상정놀음은 정치적 도발’이라는 제목으로 민족화해협의회 대변인이 발표한 담화문을 전재했다. ‘우리민족끼리’라는 매체에서도 ‘인간쓰레기들의 서푼짜리 광대놀음’이라는 관련 기사를 게재, 6·25전쟁 납북자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이 같은 반응은 곧 열리는 남북정상회담과 무관한 것 같지 않다. ‘우리민족끼리’에서는 “지금 온 겨레는 10월의 북남수뇌상봉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민족적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좋게 발전하는 북남관계를 되돌려 세우고 반(反) 6·15 전쟁세력의 《정권》탈취음모에 힘을 실어주려는 서푼짜리 광대극을 꾸미고 있다”고 필자와 납북자 가족들을 비난했다.

북한은 왜 이토록 극렬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우선은 최근 몇 년간 북한의 발목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이른바 납북자 문제를 놓고 ‘일본 피랍자’와 ‘전후 납북자’에 이어 ‘전쟁 중 납북자’까지 국제사회에 부각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보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북한의 이런 반응에는 전쟁 중 납북자 문제가 본격 거론되면 6·25전쟁에 대한 책임 문제를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배어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한에 가는 우리 대통령은 비무장지대를 걸어서 건너는 등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상징적 퍼포먼스를 비롯해 실제로 종전(終戰)을 선언하고 평화체제를 선언하는 등의 가시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애쓸 것이라는 관측들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같은 평화체제가 어떤 기초 위에 세워지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 ‘6·25전쟁이 이제 진짜 끝났다’고 이른바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체제’의 서막을 알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남북한 사람들의 소망을 담고 있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남북한의 분단은 처절한 동족상잔을 거친 탓에 동서독보다 훨씬 큰 상처와 공고한 구조를 갖고 있다. 지난 7월 말 미국의 언론클럽 연설에서 필자는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고대한다. 기만적인 평화협정으로 6·25전쟁의 책임 자체를 무마하고 허무주의를 퍼뜨리는 것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특정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백만의 순진무구한 사람들을 희생시킨 이 전쟁에는 분명 가해자가 있고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있는 것이다.

6·25전쟁 당시의 납북사건은 대부분 1950년 7월에서 9월 수복 전까지 불과 두세 달 사이에 일어났다. 서울이 수복된 직후 그해 10월 납북자 가족들이 대표단을 구성해 북한에 갔을 때 납북자들이 대거 수감되어 있었던 평양형무소 내벽에서 이런 메모가 발견됐다고 한다.

“자유여 그대는 불사조/ 우리는 조국의 강산을 뒤에 두고/ 홍염만장 철의 장막 속/ 죽음의 지옥으로 끌려가노라/ 조국이여 UN이여/ 지옥으로 가는 우리를 구출하여 준다는 것은/ 우리의 신념이라”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납북자의 소망을 그의 ‘조국’과 ‘UN’이 짓밟아버리면서 평화체제가 수립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전쟁 때 가족을 잃은 사람들, 특히 필자와 같이 가족이 피랍되어 간 이후 생사를 몰라서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선언적인 평화가 기만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일 우리 대통령이 바라는 평화체제가 6·25전쟁의 모든 책임을 덮는 결과를 가져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반역사적인 선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