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귀향 : 진심으로 스트레스입니다요. 요즘, 명절만 다가오면 아래로 9남매 둔 종가집 맏며느리라도 된 듯 하루하루 명절맞이 걱정에 면역세포가 초당 100마리씩 죽어나가는 심정이에요.

귀향거부 : 면역세포라서 다행이다. 뇌세포였다면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것이 완전 바닥날 뻔 했잖니? 그래도 명색이 작간데, 최소한 아이큐가 80은 되어야지. 그런데 왜 남자가 그렇게 명절 스트레스가 심하니?

무전귀향 : 그게 말이죠. 결혼압박 스트레스…라고 핑계를 대려고 했는데 실은 주머니 사정 때문이죠. 평소 제 행실을 보면 무척 검소하고 소박하겠구나, 생각하시겠지만 실은 지나치게 도덕적인 사람이어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돈을 물 쓰듯 하더라구요. 음…전혀 앞뒤가 안 맞네요. 암튼 그러다 보니 명절이라고 한 해에 한 두 번 찾아가는 고향집인데 어디 뭐시앤개시에서 급전이라도 땡겨야 할 판이거든요. 까딱하다간 환갑 지난 어머님한테 차비 얻어 올라오게 생겼어요.

귀향거부 :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누군가가 준 와인 한 병 들고 가면 되는 거 아니니? 낳아놓은 아들이 있어서 걔 학원비를 내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단출하니 혼자 가서 엄마한테 아양이나 떨다오면 되는 게 아들의 숙명 아닌가?

무전귀향 : 그건 딸들의 숙명 아닌가요? 아들들에게 명절은 한 해 동안 사회라는 전쟁터에서 거둬들인 전리품들을 자랑하는 자리 아닌가요? 형제들은 물론 누나나 여동생 각종 친지들에게 '저 잘나가거든요!'를 보여줘야 하거든요. 가족들한테까지 꼭 잘나가는 척 허풍을 떨 필요가 있을까 하시겠지만 실은 이게 다 엄마 친구 아들들 때문이죠. 정말 그러기 쉽지 않을텐데 울 엄마 친구 아들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다 저랑 비슷한 나이에 집을 몇 채씩 가지고 아들딸도 꼭 하나씩 잘 낳고 이혼도 안하고 효심도 지극하고 어머님께 용돈을 백만원씩 척척 찔러 넣어주는 드럽게 괜찮은 놈들만 있을까요?

귀향거부 : 학교 다닐 때 1등을 놓친 적이 없고, 취직만 했다 하면 삼숭그룹, 며느리는 어찌나 괜찮은 집 며느리인지 팔자 폈고, 아들 성품은 싹싹이 청소기를 능가해서 엄마가 아프면 하루에 열댓 번도 더 전화를 한다는 그 아들. 그 녀석 뭐하는 녀석인지 참. 그 전설의 '엄마친구아들'이 네 인생에도 태클을 거는구나. 그런데 '전리품을 자랑하는'이라는 표현은 왠지 상당히 지적으로 들린다. 그렇다면 남자는 사냥의 전리품을 뿌리고 여자는 전리품을 받기 위해 더욱 순종적인 모드로 돌입해야 하는 상황인 거지. 동시에 화가 나고. 난 왜 여자들이 명절에 그토록 전신오일마사지 받는 분위기로 기름에 전을 지지고, 떡을 만들고, 설거지 하고, 이러는지 몰랐는데, 그 말을 들으니 논리가 확 와닿는다. 정말 화난다….

무전귀향 : 그럼 나중에 사위가 부엌에 퍼질러 앉아 명태전을 맛깔나게 부쳐내고 큰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가스불 위에 식혜를 휘휘 젓고 있으면 보기 알흠다우시겠어요? 남자 작가라 그런지 제가 만일 드라마에서 그런 상황을 쓴다면 라고 쓸거 같은데요. 물론 시청률은 3.2%.

귀향거부 : 그런 정신상태로 드라마 쓰면 언제 그 유명한 '김쑤현 작가님'의 반열에 오르겠니, 이 화상아. 암튼 그대는 걍 개인기로 때워야겠다. 친척 모아놓고, 구찌 짝퉁 구별하는 법, 디올 옴므 스키니 진 멋지게 입기 비법 강의 같은 거라도 해보렴.

무전귀향 : 앗! 좋은 아이디어 같아요. 이번 명절엔 조카들에게 용돈 대신 요즘 인기라는 시나리오 작법 강의를 해줘야겠어요.

귀향거부 : 음 역시 인생 선배 조언은 금 같은 거지. 그런데 나는 사실 집안일보다는 어릴 적부터 친척들이 모여서 뭐라 말하는 게 정말 싫더라.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친척 스트레스는…친척 아이를 다 아는 척 말하는 것. 정구씨도 어디 내놔도 빠지는 방송작가에 각종 잡지신문의 칼럼니스트지만, 친척들이 "애가 어릴 때부터 움직이는 거 싫어하더니 결국 방 구석에서 벌어먹는 직업을 가졌구나" 라든가, "어릴 때 그렇게 공부도 못하더니 방송작가는 공부 못해도 하는거니?" 같은 질문 아닌 판결문 공세를 내릴 때면 스트레스 받지 않니?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애가 얼굴값 할 줄 알았다, 너 신문사도 얼굴로 밀고 들어갔다며…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걸 참을 수가 없어.

무전귀향 : 말문을 턱 막으시긴 하지만 간신히 기운 차려서 말씀드리자면 친척들 뒷담화 스트레스는 정말 심했어요. 엄마친구 아들들이랑 비교하는 건 어차피 사기성이 농후하니까 그러려니 넘어가지만 "저거 사람될까 싶었는데 그래도 지 앞가림은 하고 사는 거 보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는 똥칠의 새로운 장을 여는 멘트는 정말 참기 힘들죠. "학교에서 배운 거보다 실제 사회에 나가서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게 글쓰는 데 큰 도움이 되지! 그래서 니가 어릴 때부터 뻑 하면 가출하고 정학먹고 그랬나봐"라던가. 명절은 여행이랑 비슷해요. 딱 떠나는 순간까지만 좋아요. 가보면 별거 없고 돌아오는 길은 괴롭고…잔고는 확실히 비어있고 ….

귀향거부 : 그나저나 정구씨 이번 추석에 집에 내려갈 때 빈손으로 가기 뭐하면, 추석 한정판으로 500장만 발매된 '실물크기 zeeny's 브로마이드' 한 장 줄까? 액자에 걸어놓으면 50년 후 진품명품에 나올 수도 있을거야.

무전귀향 : 성의는 감사하나 어머님께서 집에 들이질 않으실 거 같네요. 근데 그보다 더 큰 궁금증 하나가 생기는데…그걸 왜 500장이나 찍으셨어요? 평소보다 마음이 500배나 무겁네요.

귀향거부 : 마음 무거운 게 차라리 낫지. 난 하체가 무거워.

무전귀향-신정구 : 방송작가로 '안녕 프란체스카' 등을 썼다. sooooom@naver.com

귀향거부-박은주 : 엔터테인먼트부 부장으로 '발칙칼럼'을 썼다. zeen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