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전 김철희 선생이시죠."

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장도, 김형찬 고려대 교수(유가철학), 최연식 연세대 교수(한국정치사상)도 그를 꼽았다. 경북 봉화의 유학자 권헌조(80)씨도 학문 높은 선비를 묻자 "서울에 사는 용전 선생의 학문이 높다"고 말했다. 서울 남가좌동 명지대 사거리에서 비좁은 골목길로 접어들면 김철희(金喆熙·93) 옹이 사는 소박한 단층집이 있다. 일흔 넘은 아들 내외와 함께 산다. "요즘은 근력이 떨어져서 잘 일어나질 못해." 그는 앉은 채로 두 팔을 이용해 움직이면서 이불을 펴놓은 자신의 좁은 방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앉은뱅이 선비책상에는 초서(草書)로 휘갈긴 문집(文集)의 복사물이 수십 장 놓여있었다. 누군가 조상 문집의 탈초(脫草·초서를 정자로 바꾸는 일)를 부탁했다고 한다.

요즘도 후학들이 많이 찾아오나요? 10명쯤 되나요? 얼마나 자주 오나요? 와서 무엇을 하나요? 하는 질문에 그는 “많이 찾아와.” “10명도 넘어.” “일주일에 빈 날이 없어.” “글 묻는 게 일이지” 하고 단문(短文)으로 답했다. 그는 3시간 넘은 인터뷰 시간 중 절반 이상은 대답 대신 자신의 문집을 읽었다. ‘천해정문고(天海亭文稿)’라는 제목을 단 문집은 그가 일흔 살 될 무렵인 1983년 후배·제자들이 한문으로 쓴 그의 글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한문으로 빽빽이 적힌 580쪽짜리 문집은 한글로 번역하면 단행본 예닐곱 권은 될 것 같았다.

―호 ‘용전’은 어떤 뜻입니까?

“용 룡(龍), 밭 전(田)이야. ‘현룡재전’(見龍在田)에서 따왔지. 농사 지어먹고 살았으니까. 주역(周易)에 나와.” (‘주역’ 첫 대목에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는 구절이 있다. 신성수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아직 혼자의 역량으로 솔선해 나갈 수 없는 상태이니, 자신을 이끌어줄 대인을 만나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젊은 시절엔 어디 사셨습니까?

“안동 녹전면 서삼동에서 농사를 지었어. 여가(餘暇)에 글을 읽었어. 안동 본향에서는 진성 이씨가 대성(大姓)이지. 그 다음 순천 김씨, 광산 김씨 두 씨족이 많이 살지.”

―언제부터 그곳에서 사셨습니까?

“10대째야.”

순천 김씨인 그의 선조는 10여 대째 안동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고향을 왜 떠나셨나요?

“여기 다 있어.” 그는 대답 대신 문집의 한 대목을 읽었다. “나라가 없을 때 태어나 앞길이 막히는 때가 많았다. 입이 있으니 먹는 일을 폐할 수 없고, 몸뚱이가 있으니 옷을 물리칠 수 없었다”는 구절이다.

광복 직후 대전을 거쳐 50여 년 전 서울에 올라온 그는 평생 국사편찬위원회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한문을 번역하는 일을 했다. 그의 손을 거쳐 ‘각사등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 공문서와 ‘성호사설’ ‘삼봉집’ ‘계곡만필’ 등 문집들이 번역됐다. 1993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초서해독능력을 가진 인재가 사라질 것을 우려해 만든 연수과정에서 초서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초서독해의 1인자로 평가된다. “국편(국사편찬위원회)이고, 민추(민족문화추진회)고 내가 만든 거야.” 그는 두 기관에 큰 기여를 했다는 자부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글은 누구에게 배우셨습니까?

“방란(芳蘭·김병익)이라 호를 한 5촌 숙부인데, 보통 선비는 넘으셨지. 큰 선비였어.” 그는 18세 때까지 숙부에게 배운 뒤 “영남의 거유(巨儒)인 성재(省齋) 권상익(權相翊)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어떤 책을 주로 읽으셨나요?

“사서삼경(四書三經)이지. 칠서(七書)라고도 하지. 선비라면 칠서는 다 읽어야지.”

―칠서를 읽는 순서가 있습니까.

“순서야 대중없지.”

―칠서 중에도 어떤 책이 중요합니까.

“학용(學庸·‘대학’과 ‘중용’)이지. 학(學)은 배워야 한다는 것, 용(庸)은 떳떳해야 한다는 것이야. 거기서 벗어난 것은 없어. 특이한 게 없어.”

―요즘도 책을 읽으십니까.

“계초명(鷄初鳴·닭이 처음으로 울 때)이면 독서하는 것이지.”

―칠서를 열 번 이상은 읽으셨겠네요.

“열 번도 안 읽고 그걸 어떻게 외우나?”

―칠서를 전부 외우세요?

“전부 외우지 않고 선비라 할 수 있나. 외워야 써먹는 것이지.”

―어떤 사람이라야 선비라고 할 수 있습니까.

“넉넉할 섬(贍), 갖출 비(備). 그게 선비야.” 선비는 ‘섬’이 아니라 ‘선’이라고 다시 물었지만 그는 “그렇게 써. 한자로는 선비 사(士)지만”이라고 말했다.

―무엇이 넉넉하고 무엇을 갖춰야 하나요? 돈인가요? 덕(德)인가요?

“돈뿐 아니지. 여러 가지가 넉넉해야지.” 그는 문집을 다시 펼쳐 읽었다. 고향친구인 고(故) 이가원(李家源) 전 연세대 교수에게 보낸 한문편지였다. “망담피단, 미시기장(罔談彼短, 靡恃己長·다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말고, 나의 장점을 믿지 말라)’이란 말은 천자문(千字文)에 나오는 구절이라 어린 아이도 아는 말이지만,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큰 덕은 마치 덕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大德不德)”는 내용이다.

―그런 선비가 요즘 같은 험난한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는 문집 속에 있는 ‘생존경쟁론(生存競爭論)’이란 글로 대신했다. “생존이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다. 경쟁이란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행위다. 사람이든 국가든 그 개개에게는 스스로 생존할 도리가 있다. 생존하려는 도리가 순수하고 정당하다면 무엇 때문에 남과 경쟁해야 하는가. (남을 이겨야 하는) ‘승인(勝人)’이 아니라 (자신을 이기는) ‘극기(克己)’의 교육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큰절을 하고 돌아서 나오는 기자에게 한 권밖에 남지 않았다는 문집을 건넸다. “가서 참조하라”고 했다. “지금 제자들이 이 문집 이후 쓴 글을 모아 문집 한 권을 더 만들고 있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