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세대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우리 민족끼리’라는 좌파 민족주의의 약화는 20대와 30대의 포스트 386에서 두드러지는 글로벌 지향의 강화와 무관치 않다. 그러나 포스트 386이 우경화 내지 보수화하고 있는지, 하고 있다면 그 방향이 민족주의 쪽인지 탈(脫)민족주의적인지 등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한국 사회의 20대와 30대는 풍요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저항을 통한 사회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집단적 체험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여전히 형성 중인 포스트 386의 정치지향과 사회의식은 그래서 더욱 정밀한 분석을 요하는 주제다. 서로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를 점검해본다.

지금 한국사회는 좌파 민족주의에서 포스트 386의 애국적 민족주의로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 정치학 박사)

'민족의 유구한 5천년 역사'라는 표현과 달리 민족이라는 말은 19세기까지 우리 선조들의 언어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민족은 근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영한사전에서 nation을 찾아보면 민족, 국민, 국가라는 세 가지 뜻이 나온다. 근대국가 건설은 nation-building이라고 한다. 민족은 서유럽에서 봉건질서를 해체하고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다. 봉건제의 지방분권적 영주-농노관계를 청산하고 다양한 종족(ethnic groups)을 한데 엮어 중앙집권적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하나의 문화와 하나의 언어'를 지닌 '하나의 민족'이라는 '상상(想像)의 공동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민족은 곧 국민이 되고 국가가 된다.

그런데 우리의 민족주의는 이와 궤를 달리한다. 한반도 민족주의는 일제 침략에 대한 안티테제로 출발했다. 해서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긍정과 창조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제국주의타도와 민족해방이라는 부정과 파괴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단군이 시조로 모셔지고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靈山)이 된 것도 이 시기다. 요컨대 일제 36년은 민족형성의 시대이기도 했다.

한반도 민족주의의 두 번째 특징은 단일민족국가 신화에 있다. 한반도를 제외한 전 세계 모든 국가는 예외 없이 다민족국가다. 뿌리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국가라는 공동체를 건설,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다르다. 국가는 혈연공동체와 등치되고 있다. 그 결과, 타민족에 대해 배타적인 '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가 그 어느 곳보다 강하다.

이상의 이유로 인해 한반도 민족주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이고 초(超)논리적인 당위로 작용해 왔다. 민족과 민족주의는 한반도 구성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끈적끈적한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담론구조에서 우위를 점한 것은 좌파진영이었다. 미국, 일본 해양세력과 손잡고 경제발전에 나섰던 산업화세력에 맞서 민주화세력은 자주라는 저항민족주의와 분단극복이라는 통일민족주의를 자신의 무기로 삼아 대중을 동원하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반세기를 넘게 지속돼 온 이 같은 풍조가 근자에 들어 흔들리기 시작해, 이제 그 뿌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토록 열광적인 ‘미친 소’ 타령에도 불구하고 미국산 소고기는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고,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발표되었음에도 7년 전과 같은 ‘분위기 도취(euphoria)’ 현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프간 인질사태를 반미투쟁으로 연결시키려던 시도는 아예 씨도 먹히지 않았다.

이러한 반전은 지난 10년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집권민주화세력의 민족주의는 ‘한풀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실질이 결핍돼 있는 그들의 민족주의는 민생과 미래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다. 정체불명의 한반도기의 등장과 태극기의 수난은 ‘우리민족끼리’의 허구성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이제 ‘붉은 악마’의 ‘대~한민국’과 친북좌파의 ‘우리민족끼리’는 도저히 융화 불가능한 이물질이 되었다.

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포스트386세대다. 386이 핫(hot)한 세대라면, 이들은 기본적으로 쿨(cool)한 세대다. 민족, 민중, 민주와 ‘역사의 부름’이 386의 담론이었다면, 이들의 담론은 미래와 실용 그리고 국제경쟁력이다. 386의 문화가 집단주의라면, 이들은 개인주의 문화에 익숙하다. 386이 국내지향형이라면, 이들은 세계지향형이다. 386은 대한민국을 부끄러워하지만, 이들은 자랑스러워한다. 386은 미국, 일본에 대해 묘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나, 이들은 당당하다. 이들의 애국은 기존의 엄숙함 내지 비장함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태극기 패션’, ‘애국가 편곡’과 같이 자유분방하고 재기발랄하다.

필자는 포스트386세대의 이러한 모습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진정한 애국은 동일한 혈연, 언어, 문화에서 나오는 선천적, 생래적 감정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번영을 보장해주는 국가공동체에 대한 후천적, 인공적 열정에서 비롯된다. 고로 자유공화국만이 진정한 애국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공화주의적 애국’이며 ‘민족주의 없는 애국’이다.

이러한 공화주의적 애국과 세계주의의 결합이 바로 애국적 세계주의다. 애국적 세계주의는 다문화주의(multiculturim)를 지향하며 다민족국가를 수용한다. 창조적 퓨전문화의 창출을 통한 매력국가 만들기를 지향한다. 지금 한국사회는 386의 좌파 민족주의에서 포스트386의 애국적 세계주의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거대한 이행기에 놓여있다.

애국적 세계주의는 기존의 통일담론에도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기존의 연합이네 연방이네 하는 논의는 전부 부질없는 짓이 될 것이다. 북한은 전(前)근대적인 전제국가다. 그곳에는 자유로운 시민이 없다. 오직 ‘수령’에게 충성스러운 ‘신민(臣民)’이 허용될 뿐이다. 그런 북한과 세계 첨단을 걷고 있는 대한민국이 연합 또는 연방을 통해 과연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포스트모던과 전근대의 무원칙한 결합은 상호재앙이 될 뿐이다.

최근 홍콩과 경제특구 선전의 통합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그러나 30년 전 개혁개방 이전의 깡촌 마을 선전과 국제도시 홍콩을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반도 통일론도 이제 바뀌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애국적 세계주의가 몰고 올 담론시장의 폭풍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포스트 386의 개인주의가 안티로만 머물면 역사 진보없어

김장수(고려대학교 연구교수)

포스트 386세대의 탈민족주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분분함은 일차적으로는 당위와 실재라는 두 개의 다른 차원이 논의 과정에서 무분별하게 섞인 데 기인한다. 얽힌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 나누어 논의해 보자. 민족주의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당위 차원의 주장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주로 노무현 정권을 '친북좌파'로 규정하는 뉴라이트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친북'이라는 선동적인 이름표를 떼면, 노정권의 대북정책은 '우리 민족끼리'라는 386세대의 민족주의에 그 이념적 기반을 둔 것이다. 그래서 뉴라이트는 노무현 정권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386 민족주의에 대한 공격에서 출발하여 이의 대안으로 탈민족주의를 주창한다. 한동안 민족주의=좌파, 탈민족주의=우파의 등식이 성립됐던 것도 그 때문이다.

뉴라이트가 주창하는 탈민족주의 또는 세계주의가 이념적·당위적 차원이라면, 숭실대 강원택 등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탈민족주의는 포스트 386세대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로부터의 이탈, 즉 탈민족주의적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실재에 대한 진단이다. 포스트 386세대에게는 민족이 더 이상 정치적 충성심과 심리적 일체감의 일차적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탈민족주의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주장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이 현상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이는 민족으로부터 이탈한 개인들이 찾은 새로운 충성심의 대상이 무엇인가, 즉 그 종착역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숭실대 강원택 교수는 남북한을 아우르는 우리 민족 즉, 한민족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남한의 국가로 그 일체감과 충성심의 대상이 전환하였다고 주장한다. 반면 신지호 교수는 세계가 민족을 대체한 것으로 평가한다. 신지호 교수의 주장은 민족과 이를 초월하는 세계라는 공동체의 단위가 개인들의 충성심을 놓고 경쟁하는 것으로 상정한 연세대 김호기 교수의 분류법과 맥이 닿아있다. 그러나 충성심의 대상이 민족이 아니라면 국가나 세계일 것이라는 주장은 검증된 사실이라기보다는 가능한 추론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근대 이념을 분류하는 대부분의 유형론은 개인과 이 개인들이 속한 유무형의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인식과 신념체계를 준거로 삼는다. 단순화하면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강조하면 개인주의, 공동체를 강조하면 집단주의로 분류된다. 경쟁하는 공동체 중 국가를 강조하면 국가주의, 민족을 강조하면 민족주의로 세분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탈민족의 종착역이 국가나 세계라는 공동체 중의 하나여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는 없다.

강원택 교수가 대한민국 민족주의, 신지호 교수가 애국적 세계주의의 근거로 삼은 현상들은 대부분 개인주의의 부활로도 설명된다. 그래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인식으로 이념을 분류하는 기존의 분석틀을 활용하여 포스트 386세대의 기본 특성을 개인주의로 설명하는 다양한 연구들이 축적되고 있다. 물론 향후 보다 체계적인 검증과 논의가 필요하지만 필자는 현재 포스트 386세대에 나타나는 탈민족주의는 신자유주의를 기본 특징으로 하는 21세기의 세계화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개인주의의 결과물이라고 판단한다.

포스트 386세대가 386세대의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은 단지 민족으로부터만 이탈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물론, 직장, 학교, 군대 등 거의 모든 형태의 집단주의에 대한 거부가 포스트 386세대를 규정하는 기본 특징이다. 그래서 포스트 386세대가 민족이라는 배타적인 집단주의를 극복하고 코스모폴리탄적 경향을 보인다는 세계주의자들의 주장은 아직 그 근거가 미약하다.

다른 모든 세대와 이념이 그러하듯이 386세대와 그들의 이념도 공과 과가 있다. 포스트 386세대와 그들의 이념이라고 불리는 개인주의도 마찬가지다. 386세대의 가장 어두운 모습으로 집단주의가 거론된다. 이를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포스트 386세대의 개인주의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그러나 민족주의 등 386세대의 집단주의나 공동체주의가 그 자체로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포스트 386의 개인주의가 희망적인 것만도 아니다. 개인과 이들이 소속된 공동체 중 어느 한쪽에 지나치게 치우친 이념의 한계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386세대가 부둥켜안고 있는 20세기 집단주의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개인의 부활이 필연적이다. 그러나 포스트 386의 개인주의가 386의 집단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만 머무른다면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뉴라이트에 새로운 것이 없다면 올드 레프트의 대안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자 또는 이의 한국판 버전인 뉴라이트가 주장하듯 전 세계인들과 경쟁하는 세계화 시대, 경쟁을 통한 집단적 효율성 추구는 일면 바람직하다. 우리 한국인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력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무른다면 이는 미래세계의 대안이 되지는 못한다. "함께 사는 세상은 나중에 고민하고 네가 살기 위해서는 남들과 경쟁하여 이겨야만 한다"는 조언은 20세기 올드 라이트들의 단골 메뉴 아니었던가? "이제 국경을 초월한 전세계인이 너의 경쟁상대니까 더 죽기 살기로 하지 않으면 낙오한다" 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백번 지당하다. 그러나 이는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당부일수는 있지만 어떻게 전세계인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는 21세기 코스모폴리탄들의 해법이 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