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왕들, 청나라로부터 받은 시호 철저히 숨겼다

    입력 : 2007.09.11 00:58

    이영춘 국사편찬위 연구관, 외교 자료집 ‘통문관지’ 분석
    실록에도 없어… “淸과의 事大관계는 형식적인 것”

    조선왕조 16대 왕 인조(仁祖) 이후 11명의 임금(추존임금 포함)들이 청나라로부터 받았던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이 죽은 뒤 공덕을 칭송해 붙이는 이름)가 모두 밝혀졌다. 이 시호들은 그 동안 공식 기록에서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이영춘(李迎春)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은 14일 오전 11시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역사실학회(회장 윤석효) 주최로 열리는 학술발표회 ‘조선후기 외교사의 검토’를 위해 주최측에 보낸 논문 ‘김지남(金指南)의 통문관지(通文館志)와 중국과의 관계’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통문관지’는 역관이었던 김지남·김경문(金慶門) 부자에 의해 1708년 편찬되고 1720년 간행된 뒤 19세기까지 17차례에 걸쳐 증보·중수된 외교 자료집으로, 청나라·일본과의 외교관계의 격식과 연혁, 약사(略史)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 책에 대해서는 주로 판본과 같은 서지학적 연구가 이뤄졌을 뿐 그 내용이 자세히 분석되지는 못했었다.

    ▲ 청나라 사신 일행이 1725년 3월의 영조 책봉례를 그린‘봉사도’의 한 장면. /조선일보DB
    그런데 이번 연구에서 이 책의 ‘기년(紀年)’편에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청해 받은 각 왕들의 시호를 모두 기록했음이 드러났다. ▲16대 인조(이하 재위 1623~1649)는 ‘장목왕(莊穆王)’ ▲17대 효종(孝宗·1649~1659)은 ‘충선왕(忠宣王)’ ▲18대 현종(顯宗·1659~1674)은 ‘장각왕(莊恪王)’ ▲19대 숙종(肅宗·1674~1720)은 ‘희순왕(僖順王)’ ▲20대 경종(景宗·1720~1724)은 ‘각공왕(恪恭王)’ ▲21대 영조(英祖·1724~1776)는 ‘장순왕(莊順王)’ ▲22대 정조(正祖·1776~1800)는 ‘공선왕(恭宣王)’ ▲23대 순조(純祖·1800~1834)는 ‘선각왕(宣恪王)’ ▲순조의 세자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翼宗)은 ‘강목왕(康穆王)’ ▲24대 헌종(憲宗·1834~1849)은 ‘장숙왕(莊肅王)’ ▲25대 철종(哲宗·1849~1863)은 ‘충경왕(忠敬王)’이었다.

    시호에 ‘충성 충(忠)’ ‘순할 순(順)’ ‘삼갈 각(恪)’ ‘공손할 공(恭)’ 등의 글자들이 자주 쓰인 것에서 조선 왕들이 순종할 것을 바라던 청나라의 희망사항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시호들은 ‘조선왕조실록’과 국왕들의 행장(行狀·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 능지문(陵誌文·왕이나 왕비의 생몰일과 행적 등을 적은 글)과 같은 거의 모든 공식 기록에서 대부분 자취를 감췄고 외교문서 외에는 일절 사용되지 않았다.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호를 ‘태조 강헌(康獻)대왕’ ‘세종 장헌(莊憲)대왕’과 같은 식으로 기록하던 조선 초기와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실록에도 청나라에게 시호를 청해 받은 사실만 기록했을 뿐, 받은 시호가 무엇이었는지는 기록하지 않았고 ‘희순왕(숙종)’과 같은 편린들이 인용된 외교 문서에만 전할 뿐이다. 이영춘 연구관은 “시호를 받기만 하고 기록은 물론 거론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오랑캐 나라’로 생각하던 청나라의 시호를 치욕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조공·책봉의 ‘사대(事大) 관계’라는 것은 외교적인 형식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겉으로 공손한 척하던 조선인들의 의식 속에는 청나라에 대한 반발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으며, 받은 시호를 드러내 사용하지 않아도 될 만큼 조선왕조는 거의 완전한 정치적 자주권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연구관은 ‘통문관지’를 분석한 결과 현종 이후에는 연평균 2.5회 정도만 청나라로의 사신 파견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조선 전기 명나라에 연평균 4회 정도를 보냈음을 생각할 때 상당히 평화적인 외교 관계가 유지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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