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흐른다 길따라…

조선일보
  • 박영석 기자
    입력 2007.09.07 23:10

    역사, 길을 품다
    최기숙 등 지음|글항아리|368쪽|1만6000원

    ‘제주 유생 장한철은 영조 46년(1770) 12월 25일, 봄에 있을 과거 보러 일찌감치 서울로 향했다. 애월포를 출발해 강진으로 가는 배가 태풍을 만나 유구열도(오키나와)에 표착했고 왜구까지 마주쳐 죽을 고비까지 갔다. 해를 넘겨 안남(베트남) 상선에 구조되지만 다시 태풍을 만나 동행자 29명 중 21명을 잃고 2월 3일 가까스로 서울에 도착해 과거를 치렀다.’

    과거 보러 한양 가는 길은, 청운의 꿈을 이루기 앞서 넘어야 할 첫 험로였다. 노잣돈 구하려 주막 주모에게 도포를 잡히거나, 청심원을 먹어 가며 중압감을 견디거나, 점집이 ‘급제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시키면 시킨 대로 골짜기를 건너 일생에 본 적 없는 소복 입은 여인과 연을 맺을 수 있었다. 영남 유생들은 ‘추풍낙엽’을 연상시키는 추풍령이나 ‘죽죽 미끄러질 것 같은’ 죽령을 피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고자(聞慶)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문경새재를 통해 서울로 향했다.

    금의환향하는 급제자가 있었다면 절망의 귀로에 선 낙방자도 있었으니, 영남 사림의 태두 김종직은 16세에 낙방한 뒤 귀향길 시에서 ‘시인 눈에 들지 않을 것을 일찍 알았던들, 차라리 연지(燕脂) 잡아 모란 그릴 것을’ 하며 넋두리한다.

    한문학과 역사학 등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 10명이 하나씩 ‘길’ 이야기를 펼쳐 조선의 삶을 묘사했다. 요양길·유배길엔 우울함 속 희망이 비치고, 상소길엔 개혁을 향한 비장미가 깃들어 있고, 암행어사 출도엔 짜릿한 역전의 묘미가 담겼다.

    ▲ 19세기 작가 성협의‘길 떠나는 선비’. /글항아리 제공

    가족 생계를 짊어진 장돌뱅이의 고단한 여정에도 풍미는 있었다. 주막에 들러 장국에 모주 걸치고 잠자리를 해결했고, 뗏목 타고 물길 따라 떼로 움직였다. 장터에서 좋은 목 선점하려고 택한 지름길·샛길에서 도적·맹수를 만나고, 술·여자·노름에 빠져 빈털터리가 되는 위태로운 삶이기도 했다. 매점을 통해 가격을 조정하는 악덕업자도 생겨났다.

    농민·가내수공업자·시장상인을 잇는 보부상들은 신의·상도덕을 지켰고, 남녀 동숙을 할지언정 ‘남자 부상(負商)은 여자 보상(褓商)의 짚신도 넘지 말라’는 규율에 살았다.

    청인(淸人)들의 벌목과 침탈을 막기 위한 조선 첩보원들의 목숨 건 정탐 길도 있었다. 신미양요(1871) 이듬해, ‘조선인·청인의 생활상과 총기류 실태를 파악하라’는 평안도 후창군 군수의 밀명을 받은 스파이들은 북북서로 향했다.

    조선인들은 생활고나 세(환곡) 부담을 피하려 또는 죄를 짓고 청으로 들어갔고, 정탐꾼들은 이주기간과 재산에 따라 ‘교민 갈등’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한다. ‘돌베개 배고 냇물로 입가심한다’는 옛 풍류는 그들에겐 악에 바친 현실이었다.

    그들은 음지에서 일해야 할 스파이로서의 본령을 잊고 신분을 드러내 마적에게 죽을 뻔 하거나 후창군의 군사 정보를 흘렸지만, 결과적으로 43일에 걸친 정탐 특명에 성공했다. 활동 내역과 지형·지세를 꼼꼼히 기록한 데다, 후창군의 방어 의지를 청인에게 알려 재침공을 사전에 막았다는 점에서다.

    1822년 평안도 암행어사 박내겸의 순찰에 정의로움만 가득한 건 아니었다. 순조의 명을 받든 뒤 닷새 만에 출발한 것은, ‘지연되는 시간과 누설되는 기밀은 비례한다’는 통칙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해진 도포와 망가진 갓으로도 눈 밝은 기생을 속일 수 없었지만, 박내겸 스스로도 신원을 감추는 데 철저하지 않았다. 그는 125일 동안 하루 평균 40리를 걸으면서, 암행어사가 되레 백성의 고통을 더하는 벼슬로 쓰여지고 있음을 목도한다.

    동갑내기 아내를 병으로 잃고, 심노숭은 “당신의 죽음은 나로 말미암았소. 낙토(樂土)에 당신이 가시고 악도(惡塗)에 내가 떨어지리라”고 절규한다. 1792년, 네 살 된 셋째 딸을 잃은 지 한 달이 채 안 된 때였다. 그가 상심으로 밤을 보내며 지은 시를 둔 베개맡에서 ‘침상집’이 태어난다. 남산 옛집을 찾아가 ‘제가 죽고 내년에도 쑥은 다시 나오리니 그 쑥 보면 당신께선 저를 생각하실까요?’라면서 쑥국 향처럼 가슴에 남은 아내를 불러본다. 그는 훗날 노성현감·천안군수에 오르고도, “녹이 있으나 봉양할 수 없다”며 슬픔을 곱씹었다.

    ‘유명 문인의 문하를 드나들었다’는 이유로 62세에 임자도 유배를 떠난 중인 화가 조희룡의 1년 8개월 유배생활엔 정취가 느껴진다. 아이들 글 선생으로, 섬마을 사람들의 그림 강사로, “누가 나더러 벗을 떠나 외로이 산다고 했나?” “천지가 글이요 그림이다” “내 생활이 이렇게 된 걸 탄식할 필요 없네”라면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는다.

    객지생활 5년 만에 휴가를 떠나는 7품직 관원 황윤석(1770년), 오랜 우반신 마비를 치료하러 동래온천 요양길에 오른 75세 노학자 한강(1617년)까지, 책에 펼쳐진 조선인들의 삶의 속살이 요즘 풍경과 다르지 않아 온기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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