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Chosun] '김&장' 떠나 서울대 교수로 명함 바꾸는 신희택 변호사

입력 2007.09.07 20:20 | 수정 2007.09.09 16:28

“30년 로펌서 배운 실무 새 세대에 전수할 기회”
“김&장 선배들 처음엔 섭섭해했지만 나중엔 이해해줘 감사”
이 기사는 Weekly Chosun [1972호] 에 게재되었습니다

▲ 신희택 변호사

요즘 법조계에서는 그의 행보(行步)가 화제다. 몇십억원의 연봉을 포기하고, 모교 강단에 서는 길을 택했다. 많은 동료 법조인이 “신선한 충격”이라 했고, 후배들은 “멋진 선택”이라고 했다.

30년 전에도 사법연수원을 수석 수료한 그는 많은 사람의 예측과 달리 판·검사의 길을 택하지 않고, 변호사가 10명도 되지 않는 로펌으로 갔다. 강효상 조선일보 사회부장이 지난 9월 1일 저녁 서울 반포동 메리어트호텔 30층 라운지에서 국내 최대 로펌 김&장을 떠나 서울대 법대로 옮기는 신희택 변호사를 만났다.

파란 바탕에 흰 줄무늬가 있는 셔츠를 입고 노란 넥타이를 맨 그는 벌써 변호사보다는 교수에 가까운 인상을 줬다.

기업변호사의 대표적 변호사이고, 김&장을 이끌어가는 변호사 중 한 명인데 갑자기 서울대로 가서 많은 사람이 놀라고 있다. 교수로 변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연수원을 나온 지 30년이 됐다. 65세까지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40년인데, 40년 중 3년은 국가를 위해서, 27년은 김&장에서 일했다. 그동안 로펌이 많이 발전했다. 조선일보 특집(8월 30일자)을 보니, 로펌 근무 변호사가 1500명이라고 나오던데, 내가 김&장에 들어갈 때는 10명이 안 됐다. 로펌 변호사를 다 합쳐도 20~30명이었다. 27년간 엄청난 발전을 한 것이다. 굉장한 보람을 느끼지만, 40년 중 마지막 10년 정도는 다른 보람을 위해 살아보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을 간간이 했다. 이번에 로스쿨을 시작하는 것이 좋은 계기가 되겠구나 싶었다. 실무에서 배운 것을 정리하고 새 세대에 전수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김&장으로서는 중요한 일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큰 손실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반대는 없었나. “선배들께 말씀을 드렸더니 깜짝 놀라시더라. 사무실에서 27년간 열심히 노력했고, 나름대로 기여를 했으니까 나머지 10년은 다른 방법으로 다른 보람을 느끼고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줬으면 한다고 간곡히 말씀 드렸다. 다들 섭섭해 하셨지만 결국 이해했다. 내부에서는 김&장이 할 수 있는 사회 기여 중 한 방법이 아니겠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당장은 일하는 데 불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장은 매년 몇 명씩 들어와 현재 280명이 되는 데 27년이 걸린 조직이기 때문에 저변이 탄탄하다. 시스템도 그렇고, 후배들한테 위임도 많이 돼 있다.”

로스쿨이 곧 시작되고, 법률시장 개방이 코앞에 닥쳤다. 우리 로펌의 전체 경쟁력은 어떻게 보나. “개방을 앞두고 있다 보니 엄청난 조직과 자금을 가진 영·미 로펌에 대해 국내 로펌들이 어느 정도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개방되면 엄청난 변화와 경쟁을 겪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바로 옆 일본이 개방되는 과정을 봐 왔다. 김&장을 비롯해 상당히 많은 로펌이 10년 이상 전문화·대형화 이 두 가지 화두를 가지고 노력해왔다. 규모도 상당히 커졌다. 일본과 우리의 경제 규모와 로펌 규모를 비교하면 로펌 규모가 절대적으로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는 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일부는 외국 로펌이 강한 분야가 있겠지만, 나머지는 잘 지킬 것 같다. 국내 로펌이 독자적으로 잘 경쟁하고, 한편으로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될 것이다.”

태동기에 로펌에 들어가서 기업변호사를 했다. 기업변호사가 생소한 사람도 많다. 어떤 일을 하는 변호사인가. “대개 변호사라고 하면 민·형사 사건을 맡아 법정에 나가는 것만 생각한다. ‘지금까지 형사 국선변호를 한 것 외에는 법정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면 어떻게 변호사를 하냐며 깜짝 놀란다. 기업변호사의 역할은 기업의 법률적 위험을 관리하고 조언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등산 가이드 같은 역할이다. 기업의 CEO가 저 산에 오르고 싶다고 하면 각각의 오르는 방법에 대해 위험도 등을 파악해서, 법에 맞게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다. 기업의 법률적 위험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어떻게 다룰 것인지 경영진에 자문하는 역할이다.”

주로 어떤 일을 했나. “1980년대 초부터 합작회사 설립을 많이 했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수백 개 회사를 내 손으로 설립했기 때문이다. 굉장히 많은 M&A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고, 변호사들과 협조해 처리하기도 했다.”
우리 기업의 성장과 함께 변호사 생활을 했다. 어떤 변화가 있었나. “법치주의가 정착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법에 의해 해결해야 하는데, 후진국으로 갈수록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경향이 있다. 20년을 쭉 되돌아보면 변호사 영역에서 문제가 해결되는 쪽으로 급속히 바뀌고 있는 것 같다.”

그 사이 경제가 성장한 만큼 연봉도 많이 늘었겠다. “많이 늘었다.(웃음)”

당시에는 연수원을 수석 수료하면 판·검사로 가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미래가 불투명한 기업변호사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어떤 비전이나 생각이 있었던 것인가. “생각하면 참 무모했던 것 같다. 당시는 5개년 개발계획을 하면서 한창 경제발전을 해갈 때다. ‘법조인으로서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기회는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법원이나 검찰이나 다 좋은 직업인데, 그건 사후적인 참여이고 직접 들어가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군법무관으로 가서는 당시 한·미연합사령사가 창설돼 첫 번째 단기복무를 하게 됐다. 미국과 협상하는 여러 업무에 참여하다보니 변호사 역할의 중요함을 새삼 깨달았다. 또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경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지 않겠나’란 생각도 들었다. 마침 김&장의 김영무 변호사와 정계성 변호사 등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분들과 이야기해보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결정했다.”

지금도 대학으로 간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놀랐는데, 그때는 더 놀랐을 것 같다. “많이 놀랐고, 강력하게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회를 몰라서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판·검사 하다가 변호사 해도 늦지 않다고도 했다. 모두 강하게 말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의외로 하고 싶으면 하라고 찬성해주셨다. 약혼한 상태였는데 집사람도 찬성했다.”

그때 몸 담은 로펌이 이렇게 커지고 성공할 것으로 예상했나. “너무 생각하고 따지고 그랬으면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하면 뭐가 되지 않겠냐고는 생각했지만 10년 후에 어떻게 되고, 20년 후에 어떻게 되고 그렇게는 생각하지 못했다. 일종의 벤처정신이었다.”

김&장에 대해 평가가 엇갈린다. 어떻게 생각하나. “김&장이라는 조직이 한국 풍토에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젊은 변호사들이 모여서 ‘우리나라의 법이 어떻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커진 것이다. 처음에 우리가 ‘법이 이렇습니다’라고 하면, 기업에서는 ‘변호사님들이 고지식하고, 세상 물정을 몰라서 법이 이렇다는 이야기만 한다’고 했다. 젊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고, 그대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시 김&장이 있어서 우리가 국제기준에 빨리 맞춰진 것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김&장이 한국의 대표 로펌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나. “두 가지가 아주 잘 됐다고 생각한다. 당시 김영무 변호사가 미국 하버드대에서 법학박사를 하면서 국제기준을 보고 와서 방향을 잘 제시했고, 젊은 변호사들이 열정을 갖고 일했다. 지도력과 열정이 잘 만났다. 또 당시는 한국 경제가 계속 발전하고 있을 때다. 이런 외적 요소와 내적 요소가 잘 맞지 않았나 싶다.”

다른 로펌보다 경쟁력을 갖추게 된 시스템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종전의 변호사들은 1인 성주(城主)였다. 단독으로 사건을 처리했다. 우리는 팀플레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제너럴리스트가 돼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러면 죽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분야 최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국제무대에서는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각자 최고 전문가가 되고, 전문가끼리 팀워크를 갖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것이 비결이 아닐까 싶다.”

김&장에 대한 비판 중에는 외국 자본에 많이 기여한 것 아니냐는 부분이 있다. 단순한 법률자문이 아니라, 강력한 로비활동까지 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외국 자본 문제에 대해서는 관점의 차이일 수 있다. 1980년에 변호사를 시작해보니 의뢰인의 80~90%가 외국 기업이었다. 법을 물어보고 자문료를 내는 한국 기업은 거의 없었다. 1990년대 이후 법률 문제가 복잡해지고 법치주의·투명성이 대두되면서 국내 기업들이 변호사를 활용하고 자문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제는 국내 기업이 전체 고객의 40~60%까지 됐다.

또 왜 외국 기업을 돕느냐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우리 기업의 해외 투자를 돕다 보니 투자국에서 우리 기업을 도와주는 어떤 전문가 집단이 있다는 것이 투자의 주 요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나라 정부나 강력한 기업과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 분야의 전문변호사를 선임해 싸워서 이길 수 있다면 장기적 투자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도 해외 투자를 많이 하는 마당에 그런 흑백논리는 바람직하지 않다.

고객이면 외국 기업이든 국내 기업이든 법적 보호를 받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걸 소홀히 했다면 한국 법률시장이 그 전에 개방 압력을 엄청나게 받았을 것이다.”

로스쿨에 대해서 물어보겠다. 로스쿨 도입에 찬성했나. “1982년 예일 로스쿨에 가보고 굉장히 부러웠다. 법을 이렇게도 가르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로스쿨 논의가 나올 때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에 주저했다. 지금은 2007년이다. 해외시장이 개방되고, 한국의 좁은 법률시장에서 국제적인 큰 법률시장으로 편입되는 시기다. 우리 경제력도 많이 커졌고, 지금은 로스쿨을 해야 될 때가 아닌가 싶다.”

로스쿨에서 제대로 법교육이 될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다. “사회 전체가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판·검사는 별도로 교육할 텐데 변호사에 대한 직무교육은 누가 하느냐는 문제도 있다. 미국 경우는 오래전부터 전국에 수도 없는 로펌이 있고, 로펌마다 특성화돼있어 필요한 인력은 로펌 스스로 교육하는데, 우리는 그런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다. 그게 큰 과제다.”

예일대는 미국의 다른 로스쿨과 색깔이 다르다. 공익을 강조한다. 서울대 로스쿨은 다른 대학 로스쿨과 차별되는 색깔을 갖게 될까. “학장과 교수들이 앞으로 연구해야 한다. 예일대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비즈니스 변호사를 만들기보다 공익에 기여하는 국가지도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학교에 남아 후학을 기르는 것 또한 높이 평가한다. 미국 로스쿨은 학교마다 방점을 찍는 부분이 다르다. 지금 말씀드릴 것은 아니지만, 서울대에 있는 교수들과 많은 토론이 이뤄질 것이다. 국립대학이고 국가의 혜택을 받고 있으니 국가지도자를 키워내는 그런 학교가 돼야 하지 않겠나.”

학생 선발과 관련해서도 관심이 많다. 미국식으로 다양한 연령층에서 뽑는 것에 대한 염려도 있을 수 있다. 직장인도 많이 준비하고 있고, 유학생도 들어오려고 한다. 어떤 학생을 어떻게 평가해서 뽑으려고 하나. “그것도 학장님께 여쭤야지.(웃음) 단기적으로는 큰 혼란이 있을 것이다. 로스쿨이 시작되면 전 인문사회, 자연계까지 대학 교육 자체가 굉장히 왜곡될 소지가 있다. 직장인까지 대거 들어오려고 하고, 혼란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정원 등의 부분에서 어설프게 정치적 타협을 하면 문제가 더 확산될 수 있다. 서로 이해가 다를 수 있지만 교육이라는 사회의 중요한 인프라에 대해 조정이 이뤄져야 한다.”

로스쿨 정원은 어느 선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나. 필요한 변호사 수는. “정통하지 못해서 말하기 곤란하다. 개인적으로는 수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한다. 결국 시장에 맡겨지는 것인데, 인위적으로 줄여놓으면 왜곡이 일어나서 장기적으로도 조정이 안 될 수 있다.”

일본 로스쿨은 성공했다고 보나, 실패했다고 보나. “성공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본은 시작한 이후 얼마 안 돼 단정하기 어렵지만, 차라리 미국 시스템으로 가야 하지 않겠나 싶다. 로스쿨 교육의 질을 강화하고, 여기서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대체로 변호사가 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1975년 서울대를 수석 졸업했다. 그때 청와대로 초청됐다던데. “청와대에서 서울대 단과대 수석 졸업생들을 초대해 점심을 줬다. 교수님도 그렇고 다들 굉장히 긴장해서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모르고 그땐 그랬다.”
육영수 여사가 맘에 들어 해서 혼담이 있었다는 소문도 있다. “육 여사는 우리가 4학년

때 이미 돌아가셨다. 그래서인지 점심 분위기가 썰렁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봤는데 마음이 좀 안 좋았다. (햇볕에)많이 타시고, 혼자여서 그런지 근엄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기보다는 좀 안쓰러웠다.”

사법연수원 동기 중에 노무현 대통령, 정상명 검찰총장 등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과 분위기는 어땠나. “58명이 2년을 같이 있었다. 10달 정도 각자 실무수습을 하고 나머지 기간은 한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굉장히 친했다. 학교 구분 없이 ‘선배님’이 아니라 ‘형’이라고 불렀다.”

노 대통령은 그때도 화제가 되는 인물이었나. “굉장히 친화력 있는 사람이었다. 소탈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둘이 앉아 이야기할 때도 어깨를 끼고 하는 등 격의 없이 이야기했다. 대통령 되고 나서 따로 본 적은 없고, 연수원 동기들을 2005년에 부부동반으로 청와대에 초대한 적은 있다.”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나. “정치할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나중에 정치에 나왔을 때 굉장히 뜻밖이었다.”


학력에서 오는 위화감은 없었나. “그런 의식은 없었다. 58명이다 보니 따지고 그러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집안이 편하고 도움을 잘 받아서 고시에 합격한 사람보다 어렵게 된 사람이 훨씬 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앞으로 법률문화를 바꿔갈 위치에 서는데, 어떤 점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나. “시장 개방이 되면 국제기준에 맞는 경쟁력이 없으면 도태된다. 법조계 전체 수준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지만, 큰 무대에서 통할 우수한 법조인을 키워내는 것도 중요하다. 사회체육을 보급해서 다들 잘 하는 것과 국제무대에서 통할 선수를 만들어내는 것은 모순되는 개념이 아닌데 우리 사회에서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생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언제가 가장 어려웠나. “예일대 로스쿨에서 공부할 때다. 공부하면 자신 있었는데, 거기서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막히게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 충격이 굉장히 컸고, 엄청 위축되고 괴로웠다. 이런 경험 덕에 앞으로 그런 학생들과 경쟁할 우수한 학생을 많이 길러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그때 힘들었지만 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 교수로 연결된 측면도 있다.”

나중에 김&장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란 추측도 있다. “생각해보지 않았다. 법조계 40년 중 나머지 10년은 대학에서 쓰겠다.”

교수가 되면 연봉이 상당히 줄어들 텐데 어느 정도인가. 10분의 1, 100분의 1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10분의 1보다는 더 작아지겠지만 100분의 1은 과장인 것 같다. 어쨌든 돈을 많이 못 받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집에서 쉽게 허락을 받았나. “집에서는 쉽게 결재 받았다. 집사람이 아이들을 불러서 아버지가 이제 대학으로 가시니까 너희들 씀씀이도 거기에 맞추라고 하더라.” ▒

신희택 변호사는
신희택(申熙澤·55)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수석 졸업, 사법연수원 수석 수료의 ‘수석 2관왕’ 출신이다. 사법시험 16회, 연수원 7기. 1980년 김&장에 합류한 뒤 예일대에서 국제통상법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이후 통상과 국제투자거래 분야에서 국내 법조계를 대표하는 국제통으로 인정받고 있다.

국내 최대 로펌인 김&장의 대표적 스타 변호사인 그가 김&장을 떠나 서울대 법대 교수로 간다는 소식은 법조인들에게 충격을 줬다. 현 김영무 김&장 대표 변호사의 후임으로도 거론되는 신 변호사는 최근 조선일보가 20대 로펌 대표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이 시대 최고 변호사’로 뽑히기도 했다. 1998년 스웨덴 볼보그룹이 삼성중공업 중장비 부문을 인수할 때 법률자문을 주도하는 등 대형 M&A에 많이 참여했다.

30년 전에도 사법연수원을 수석 수료한 그는 많은 사람의 예측과 달리 판·검사의 길을 택하지 않고, 변호사가 10명도 되지 않는 로펌으로 갔다. 강효상 조선일보 사회부장이 지난 9월 1일 저녁 서울 반포동 메리어트호텔 30층 라운지에서 국내 최대 로펌 김&장을 떠나 서울대 법대로 옮기는 신희택 변호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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