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엔 바이올린, 다른 손엔 부처의 머리를 쥔 남자가 지구 위에 올라서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관객을 맞았다. 입상의 눈·코·입, 몸통과 두 팔을 이룬 16대의 TV 화면 속에서 고(故) 백남준(白南準·1932~2006)씨가 웃고 있었다. 가로 1.91m, 세로 2.75m, 폭 99㎝. 살아 있는 사람들을 굽어보는 키 큰 설치 작품 '백남준Ⅱ'다. "내 남편, 잘생겼지요?" 백씨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70)씨가 자랑했다. 그리운 눈동자로 화면을 들여다보며 "안녕, 남준(Hi, Nam Jun)" 했다.

그녀는 뉴욕 맨해튼의 마야 스탕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996년 백씨가 쓰러진 뒤 간병에 전념해온 구보타씨가 12년 만에 '아내 구보타'에서 '작가 구보타'로 돌아오는 전시다. 남편이 타계한 뒤 1년 7개월간 작업한 설치 작품과 비디오 열 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에 그녀는 '백남준과 함께한 내 인생(My Life With Nam Jun Paik)'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오랜만에 개인전을 하면서 왜 남편을 앞세웠습니까?

“관객들이 내 이름을 몰라도 좋아요. 내 작품을 보고 ‘백남준’의 이름과 예술을 떠올리면 족해요. 이번 작품은 모두 대가 백남준에 대한 ‘오마주(헌정)’예요.”

늦여름 맨해튼 거리를 그녀는 무거운 추억을 짊어진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걸었다. 당뇨를 앓는 구보타씨는 지팡이 없인 오래 걷지 못한다.

―언제부터 준비했습니까.

“장례를 치를 때부터 이번 전시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이는 비디오 아트를 시작한 위대한 예술가예요. 하지만 영광은 짧고 예술은 쉽게 잊혀져요. 그이를 영원히 살게 만드는 게 내 일이에요.”

작업실과 자택을 겸한 맨해튼 소호의 스튜디오는 창고처럼 넓었다. 무려 3000㎡(900평)이다. 소호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북적거리던 1974년, 두 사람이 어떤 후원자에게 ‘단돈 1만2000달러’에 산 집이다. 스튜디오엔 백씨의 초기 작품, 만들다 만 설치작품, 신문 스크랩, 즐겨 치던 전자 피아노, 자주 쓰던 편집 기계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백씨가 불쑥 나타나 “누구야?” 할 것 같았다. 벽에는 백씨가 크레파스와 먹과 펜으로 그린 그림 수십 장이 붙어 있었다. ‘나는 64세인데, 74세까지 살고 싶다(I am 64. I want to become 74)’고 적힌 메모도 있었다. 그는 74세 생일을 반년 앞두고 요양지인 마이애미에서 타계했다.

2007년, 소호는 명품 가게가 늘어선 쇼핑 거리다. 요즘 가난한 예술가들은 돈이 없어서 소호에 못 산다. 구보타씨에겐 쓸쓸한 일일지 모른다. 그가 냉장고에서 오미자차를 꺼냈다.

“남준이 30년 동안 거의 매일 참치 샌드위치를 사먹던 가게가 지난달에 문을 닫았어요. 임대료가 너무 올라서 버틸 수가 없대요. 그이가 다니던 집 중에선 그래도 그 집이 제일 오래 버텼는데….”

―그래도 1주기 때보다 얼굴이 나아졌습니다.

“오미자차 덕분인가? ‘대장금’에 나온 예쁜 여배우가 인터뷰에서 ‘오미자차를 마시고 원기를 회복했다’고 하기에, 나도 얼른 샀어요. 이거 마시고 작업 열심히 하려고. 지난 1월 남편 1주기 때였는데, 남대문시장 상인이 날 알아보고 ‘백남준 선생님 부인이지요?’ 하며 내 비닐봉지에 덤을 막 쑤셔 넣었어요. 10만원어치 샀는데 20만원어치는 준 것 같아.”

―두 분은 자식도, 애완견도 없지요?

“젊어서 우리 부부는 혹독하게 가난했어요. 한 번은 남준이 그래요. ‘아이를 가지면, 예술을 못 할 것 같다’고. 그이에겐 이 세상 무엇보다 예술이 중요했어요. 이런 천재가 아이들 등록금 버느라 예술을 관두게 해선 안 되죠.”

말년에 좌반신을 못쓰게 된 뒤 백씨는 종종 우울에 침잠했다. “무슨 생각 하냐”고 아내가 물으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 중이야”라고 답하곤 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그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작품을 어떻게 현실에 옮길까 궁리했다. 구보타씨는 “그이는 죽을 때까지 돈 걱정을 했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예술가가 왜 돈 걱정을 합니까?

“젊어선 작품이 안 팔렸어요. 유명해진 뒤에도 그이는 결코 ‘잘 팔리는 작가’는 아니었어요. 세상에서 ‘백남준을 안다’고 떠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이가 유명해진 다음, 뒤늦게 그이 인생에 나타난 사람들이에요. 기자들, 화상(畵商)들, 사진가들, 컬렉터들…. 그래도 그이는 자기 곁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전부, 진심으로 좋아했어요.”

생전에 백씨는 기자들에게 “(아내가) 하도 따라다녀서 불쌍해서 결혼해줬다”고 장난스레 말했다. 두 사람은 1963년 도쿄에서 처음 만났고, 70년에 함께 살기 시작해 77년에 결혼했다.

―남편이 미울 때는 없었습니까.

“왜 없어요? 난 그이의 행위예술보다 비디오 아트를 좋아했어요. 그이에게 ‘신문 톱 기사로 실리는 예술 따윈 싫어!’ 했지요. 그이가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것도 질투했지요. 너무 미워서, 저 사람이 왜 저럴까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이는 부호의 아들이었지만 해방과 6·25가 닥치자 조국을 떠나야 했어요. 집시처럼 미국, 홍콩, 일본, 독일을 떠돌았지요. 한 번은 여름 코트 안감을 한국 삼베로 대줬더니 아이처럼 좋아했어요. 그런 식으로 사소한 부분까지 조국을 그리워했지요. 그이를 이해하자 질투와 미움이 동정으로 바뀌었어요.”

―남편이 타계한 2006년 1월 29일은 일요일이었지요?

“그이는 부활절에 쓰러졌어요. 나는 ‘당신도 부활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농담했죠. 그이는 장어 덮밥을 좋아했어요. 내가 차이나타운과 일본 생선 가게를 돌며 싱싱한 장어를 구해다 일요일 별식을 차리곤 했지요. 그날도 장어 덮밥으로 이른 저녁을 먹었어요. 내가 ‘맛있어요?’ 하니까 그이가 일본말로 ‘오이시이, 오이시이(맛있어, 맛있어)’ 했지요.”

그게 부부가 이승에서 나눈 마지막 말이 됐다. 장어 덮밥을 먹은 대가는 잠깐 낮잠을 자는 사람처럼 스르르 영면에 들었다. 창고 같은 스튜디오에 혼자 앉은 채, 구보타씨는 눈물을 훔치고 숨을 골랐다. “슬픔이 많았던 인생이라 마지막만은 극적인 고통이 없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이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아요.”

이 집에 들고날 때마다 구보타씨는 “남준, 나갔다 올게”, “남준, 나 왔어요” 같은 말을 하며 일본식으로 불단에 향을 피우고 손을 모았다. 불단에는 영정 대신 1970년대에 만든 백씨의 데드 마스크가 놓여 있었다. 데드 마스크 속의 백씨는 여전히 콧날 반듯한, 명민한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구보타씨는

‘백남준의 반려’로 더 널리 알려져 있지만, 구보타 시게코씨도 평생 비디오아트를 한 작가다. 그녀는 1937년 일본 니가타에서 태어나 1960년 도쿄 교육대학을 졸업했고 뉴욕대학에서 수학했다. 1977년 독일 카셀 도쿠멘타에서 남편 백씨와 나란히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뉴욕 현대미술관 개인전(78년), 일본 하라 현대 미술관(原美術館) 개인전(92년)을 거쳤고, 9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며 작가 경력의 절정에 오른 1996년, 백씨가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그녀는 병수발에 전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