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에 불협화음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박근혜 전 대표 측이 반성부터 해야 한다"는 이재오 최고위원의 인터뷰 내용이 알려지면서 박 전 대표 캠프 인사들은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박 전 대표 캠프 대변인을 맡았던 김재원 의원은 "당 화합과 정권 교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만큼 승자의 입장에서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본지 8월 25일자 보도)
이재오(李在五·62) 한나라당 최고위원을 두고 이명박(李明博) 후보 측근들은 'MB(이명박) 대통령 만들기' 작전을 총괄 지휘를 하는 '야전사령관'이라고 한다. 실제 이 최고위원은 이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생각을 가다듬고 있던 초창기부터 이 후보와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가다듬어 왔다. 지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도 이 최고위원은 'MB 캠프'의 좌장으로서, 캠프 내 조직과 구성원들의 인사(人事) 문제에 이르기 까지 깊숙이 관여를 했다. 특히 그는 당내 경선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표의 저격수' 역할도 마다하지 않고 이 후보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다.
이로 인해 이 최고위원은 이 후보의 큰형인 이상득(李相得) 국회 부의장, MB의 복심으로 일컬어 지고 있는 정두언(鄭斗彦) 의원, MB에 의해 한나라당 신임 사무총장으로 발탁된 이방호(李方鎬) 의원과 더불어 'MB 핵심 측근 4인방'으로 불린다.
이재오 최고위원은 이명박 후보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경선에서 승리한데다 오는 12월 치러질 본선에서도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로 평가되면서 세간(世間)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어쩌면 이 최고위원은 1996년 제15대 총선을 통해 제도 정치권으로 진입한 이래 최고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연 그는 누구인가.
새벽형 인간… 아침 7시면 캠프에 출근
이 최고위원은 ‘새벽형’ 인간이다. 그는 매일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운동복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지역구(서울 은평구을 선거구) 구민들을 만난다. 그의 ‘자전거 순례’는 15년 이상 지속돼 오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그의 애마(愛馬·자전거)를 3대 잃어버렸다고 한다. 이 최고위원은 자전거 순례와 함께 매일 새벽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약수터를 찾는다. 지역구 주민들은 이런 이 최고위원에게 ‘약수터 할아버지’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다.
이 최고위원은 지난 경선 과정에서도 MB 캠프 내에서 가장 먼저 출근을 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그는 당내 후보 경선일이 코 앞으로 다가오자 아예 야전침대를 캠프 내 자신의 사무실에 가져다 놓고, 이 곳에서 먹고 자면서 막바지 선거활동을 독려했다. MB캠프의 미디어홍보기획단장이었던 강승규 씨는 “이 최고위원은 항상 매일 아침 7시를 전후해 캠프 사무실로 출근을 하고, 밤 12시나 새벽 1시가 되어서야 퇴근을 하거나 아예 밤을 꼬박 새우는 경우도 허다했다”면서 “아마도 부지런한 면에서는 이 최고위원을 따라 올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강 팀장은 “이 최고위원과 이명박 후보는 서로 닮은 점이 많지만, 두 분 다 부지런하다는 점이 가장 닮은꼴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2년 제17대 대선 때에도 한나라당 대선기획위원을 맡아 야당의 폭로전을 온 몸으로 막았고, 이 때에도 국회 의원회관 내 자신의 사무실 야전침대에서 생활을 했다.
제17대 국회 초기에 이 최고위원과 함께 당내 최대 모임인 ‘국가발전연구회’를 조직했고, 과거에도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을 같이 해 온 박계동(朴啓東) 한나라당 전략기획본부장은 “이 최고위원의 집념에 혀를 내두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박 의원은 “이 최고위원이 2006년 1월 당내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를 했을 때, 이 최고위원은 늦은 밤이나 새벽 2∼3시 등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의원들 개개인의 집을 찾아가 지지를 호소하는 바람에 이 최고위원을 지지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이 최고위원은 자신에게 불리한 세(勢)를 뒤집을 줄 아는 정치인”이라고 덧붙였다.
이재오 최고위원은 일단 행동방침이 정해지면, 그 때부터는 뒤도 돌아보니 않고 그냥 앞만 보고 돌진한다. 지난 경선 때 이명박 후보의 비서실장을 지낸 주호영(朱豪英) 한나라당 의원은 “이 최고위원은 검찰이 이명박 후보에게 불리한 수사결과를 발표하자, 비가 오는 밤 10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원 몇 명을 소집해 대검찰청으로 달려가 철야 항의농성을 벌였고, 그 결과 대검 고위 간부로부터 ‘도곡동 땅은 이 후보 소유가 아니다’는 말을 받아 냈는데, 이 최고위원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했다.
이 최고위원은 불법 대선자금 사건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인 2003년 10월 전격적으로 당 사무총장 겸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이때 행한 취임식 인사말에서도 그의 ‘돌격 앞으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이 최고위원은 “팔다리가 잘리고 거리에 나가 앉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각오를 피력해 당직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재오 최고위원이 중견 정치인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로 ‘탈(脫)권위주의’ 성격과 몸에 밴 근검절약 정신을 꼽는 사람들도 많다. 그의 이같은 성격은 소작농인 부모 밑에서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지독히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생활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재오와 이명박
이재오 최고위원과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간의 인연은 이들의 대학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64∼1965년 이명박 후보는 고려대(경영학과)에서, 이재오 최고위원은 중앙대에서 한일회담 반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각 대학의 대표급이었던 두 사람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남이 이뤄졌다. 이명박 후보는 1992∼1994년 6·3 동지회 회장을 지냈고, 이재오 의원은 현재 이 모임의 회장이다.
제15대 국회를 통해 처음 제도정치권에 진출한 이재오 최고위원은 제14대 전국구 의원을 거쳐 15대 서울 종로구에서 당선된 이명박 후보와 국회에서 다시 만나게 됐고, 이후 이들의 만남은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다.
이 최고위원은 2002년 5월 한나라당 원내총무의 임기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이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는 이재오 최고위원에게 선대본부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고, 이 최고위원은 그 자리에서 두말 하지 않고 본부장직 요청을 수락했었다고 한다. 알려진 것과 같이 이 최고위원은 지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에도 이 후보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최고위원은 MB 선거캠프 내에서 특별한 직책은 맡지 않았으나, 누구나 그를 캠프 내 좌장이라고 불렀다.
두 사람간 40년 인연을 놓고 볼 때 이 최고위원은 앞으로도 항상 이명박 후보의 최측근에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 바로 잡습니다 1일자 B15면 ‘이재오는 누구?’ 기사 중 ‘제17대 대선 때에도 야당의 폭로전을 온몸으로 막았고’ 부분을 ‘제16대 대선 때에도 여당의 폭로전’으로 정정하며, 같은 기사에서 ‘돌아보니 않고…’는 ‘돌아보지 않고’의 오기(誤記)입니다. 같은 지면의 ‘박상천의 DJ 뛰어넘기’ 기사 중 ‘용납하기 내용’은 ‘용납하기 힘든 내용’으로 바로잡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