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사람은 겉만 보곤 알 수 없는 동물인가 보다.

'가짜 학위' 파문의 돌풍을 앞서 일으킨 신정아 전동국대 교수 얘기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10년전인 97년이었다.

그때만해도 아무도 신씨가 이렇게까지 엄청나게 본인의 이력을 부풀리고 가짜 학위를 만드는 대범한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나처럼 한동안 미술계를 떠나 있던 사람이라면 과연 동일 인물인지 황당해진다. 10년 세월 동안 그녀는 미술계의 피래미에서 실력자, 권력자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당시 신씨는 금호미술관의 실력있는 큐레이터였던 박영택(현 경기대 교수), 박정구씨 아래에서 심부름을 하듯 언론사를 찾았던 20대 중반의 풋풋한 아가씨였다.

금호는 인사동 금호갤러리에서 사간동에 신축건물을 짓고 금호미술관을 개관했다. 97년 호안미로전 당시 처음 등장한 그녀는 '미술공부를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서울대 동양화과에 합격했지만 미대를 다니지 않고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으며, 95년 한국에 와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에서 사고를 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며, 이제는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늘씬한 키에 화장기 없이 풋풋한 맑은 얼굴로 나타났던 그녀는 똘똘하고 깍듯하며 붙임성도 있어 기자들 사이에서 호감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뿐 아니다. 지금이나 당시나 '큐레이터'라면 전문교육을 받아야 하기에 그녀를 '큐레이터'로 대접해야할지 고민하던 중에 그녀를 '금호미술관 신입 큐레이터'로 소개된 인터뷰 기사가 났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겪고 살아난 20대 아가씨가 금호미술관 큐레이터가 됐다는 내용이었다.

신씨는 미모의 삼풍백화점 사고 생존자라는 점 하나로 단숨에 '큐레이터'로 공개 인사를 한 셈이 됐다.

당시 기자는 신씨가 전문 큐레이터로서 경력이 없다는 점을 고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않은 그녀를 어떤 신분으로 봐야 하나 하고 잠깐 고민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시 박영택씨 등 기존의 큐레이터가 모두 미술관과 갈등 속에 그만둔데다가 신씨는 유일한 후임자였고, 전임자가 전시기획했던 일을 열심히, 또 큰 무리없이 처리 했고 또 몇 차례 더 전시를 치른 후에는 자연스럽게 큐레이터로 자리를 잡아가는 분위기였다.

기자 역시 신씨를 '삼풍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자기 꿈을 이루려는 사람'으로 측은지심으로 바라본 입장이었다. 새파란 신진이었던 신씨가 이력서에 학력을 위조해서 내밀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신씨에 대해 생각해보면 20대 중반의 나이에 아르바이트생 신분으로 미술계에 발을 디딘 후 언론이나 미술인들에게 자신을 어필하고 자기 자리를 차지해간 과정은 학위를 떠나 그녀의 또다른 능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학위를 위조하지 않고 실력있는 '전시기획자'로서 승부를 걸었더라도 성공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미술 분야를 떠난 기자는 나중에야 신씨가 2001년 전시중에 화재 사건으로 성곡미술관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후 6년이 지난 지금 한 선배는 이렇게 고백했다. "예일대 한국동문회장을 지낸 박성용 금호그룹 회장이 당시 신정아의 예일대 박사 공부중이라는 얘길 박강자 금호미술관장에게서 듣고 '거짓'임을 알아채고 '사표를 받으라'고 했다 "며 "신정아에게 학위 진위를 캐물으니 펄펄 뛰면서 '예일대에 학비 보낸 통장 보내드려요' 등 강력대응하는 바람에 그냥 넘어갔고, 그러다가 미술 분야를 떠나게 됐다"고.

신정아씨의 첫 직장이었던 금호미술관이 처음부터 제대로 대처했다면 지금과 같은 큰 사건으로 비화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신씨 개인으로서는 '지나친 과욕으로 아직도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결국 자기 무덤을 판 꼴'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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