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사랑] 참의부(參議府)

조선일보
  • 이덕일 역사평론가
    입력 2007.08.14 21:56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중경(重慶)에서 창설된 광복군 이외에는 군사조직이 없었던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임정의 군사활동은 1920년대가 절정기였다. 1920년 7월 임정 국무회의는 만주에 광복군 사령부(총영·總營이라고도 함)를 설치 의결했는데, 이때 상해에서 무기를 공급했던 광복군 군정국장 김승학(金承學)은 회고록 ‘망명객 행적록(行蹟錄)’에서 1920년 8월경부터 연말까지 일제의 발표로도 교전 78회, 주재소 공격이 56회나 되어 “압록강 연안 일대와 평북지방은 일시 전장화(戰場化)하여 적측에서도 상당히 당황했다”고 전하고 있다.

    광복군 사령부는 1924년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약칭 참의부)로 재편되는데, 그 직후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저격해 큰 충격을 주었다. 참의장 백광운(白狂雲) 장군은 사이토가 1924년 5월 19일 압록강 상류에서 신의주로 내려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저격을 지시했다. 소대장 장창헌(張昌憲)과 대원들은 고구려 국내성 아래의 집안(集安)현 소랑곡(小浪谷)에서 총독이 탄 무장 경비선 아스카마루(飛鳥丸)와 유희마루(雄飛丸)에 총격을 퍼부었고 두 배는 황급히 도주했다. 일제 경무국(警務局)에서 작성한 ‘총독 저격사건에 관한 건’은 ‘흉한(兇漢)’, 즉 참의부 독립군 10명이 40~50발을 발사했고, 일제는 72발을 응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참의부는 1924년 6월에만 17회에 걸친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는 등 1929년 한국독립군, 조선혁명군과 통합할 때까지 수도 셀 수 없는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 과정에서 비극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1925년 3월 16일의 고마령(古馬嶺) 참변인데, 밀정의 밀고를 받은 평북 초산경찰서 소속 65명이 집안현 산중에서 회의 중이던 참의부를 습격해 치열한 총격전 끝에 참의장 최석순(崔碩順) 이하 29명이 전사한 비극이다. 지난 4월 고마령 참변의 현장을 답사할 때 그 치열한 총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8·15 광복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독립군의 이런 투쟁과 피의 대가로 쟁취한 결과물이란 사실을 잊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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