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와 계초 방응모 선생

조선일보
  • 이한우 기자
    입력 2007.08.07 00:02

    두터운 교분, 돈독한 우정
    온천 같이 갈 정도로 허물없이 지내
    만해, 계초의 회갑 때 축하詩 지어줘

    ▲ 계초 방응모 선생
    만해 한용운과 계초 방응모는 삶의 궤도는 달리 그렸지만 두 사람의 돈독한 우정은 유례를 보기 힘들 만큼 남달랐다. 만해는 독립운동가요,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의 시인이요, 불교학의 대학자이자 대사상가요, 선지식이었다. 계초는 당대 제일의 금광주요, 조선일보를 경영한 탁월한 경영인으로서, 조림과 간척사업으로 역사의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1879년생 만해와 1884년생 계초의 교류는 만해에 대한 계초의 존경에서 시작됐다.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18세 때 서당 훈장을 할 만큼 한학(漢學)의 소양을 갖춘 방응모는 1920년대에 동아일보 정주 지국장을 지내며 국민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3·1독립운동에 이어 옥중투쟁을 전개한 만해에 관한 연이은 보도를 보면서 계초는 자연스레 만해에 관한 존경심을 키워갔다.

    이후 계초는 조선 제1의 금광주가 됐고 조만식의 소개로 벽초 홍명희, 만해 한용운과 깊은 교유관계를 맺게 된다. 이 때는 만해가 신간회 경성 지회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다. 이때부터 계초는 수시로 의정부 별장으로 만해를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을 초청해 시국에 대한 고민을 경청하며 민족의 앞날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계초는 특히 만해 한용운과 벽초 홍명희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1933년 무렵 계초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만해를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준 것은 유명한 일화다.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만해·벽초·계초는 새해가 되면 함께 백천 온천에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교분을 맺었다.

    계초의 배려에 늘 감사하고 미안해하던 만해는 1935년 4월9일부터 조선일보에 장편 ‘흑풍’을 연재했다. 이 소설은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연재 10개월 동안 발행부수가 당시로서는 놀라운 숫자인 6000부나 늘기도 했다. 벽초도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했다. 광산을 팔아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넣었던 계초로서는 말할 수 없는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만해는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계초를 위로했다.

    온 세상이 암울한 침묵 속에 빠져든 암흑 속에서도 만해·벽초·계초는 서로 만나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했다. 해방을 목전에 둔 1944년 회갑을 맞은 계초를 위해 만해는 축하시를 지었다.

    ‘서녘에서 온 기운/ 기이도 하여/ 비와 구름 그 조화/ 때를 알아라./ 큰 붓을 잡으면 활살(活殺)이 자재(自在)인데/ 수재들은 또 얼마나/ 모인 것이랴./ 용을 잡고 호랑이 치기쯤/ 마음대로요./ 학이나 갈매기와/ 벗할 날도 있으리. 남산처럼 사소서.’

    여기서 서녘은 계초의 고향 평안도를 뜻하는 것이리라. 당대의 거부이자 언론경영인 계초와 시인이자 민족운동가 만해의 뜻 깊은 만남은 같은 해 6월29일 만해가 입적하면서 아쉬운 종언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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