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야화] 유행 타는 문화재 발굴

조선일보
  • 신형준 기자
  • 도움말=이건무 용인대교수(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이한상 동양대교수(문화재 전문위원)
    입력 2007.07.09 02:01

    발굴도 유행을 탄다.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유물이나 유구(遺構·건축물 등의 흔적)가 일단 한번 나오면, 이후로는 ‘발굴 경험’이 공유되기 때문에 잇따라 찾게 된다. 이미 여러 차례 발굴됐는데도 용도나 의미를 모르고 지나쳤다가 누군가가 실마리를 풀어 ‘재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1998년 6월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어느 발굴단이 수년 전 경북 경산에서 출토한 유물들을 보존 처리하면서 2000년 전의 목제 현악기가 출토됐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공개된 목제 현악기는 목제 부분은 대부분 썩어 없어지고, 목제 외부에 옻칠한 성분만이 남은 상태였다(옻칠 성분은 수천 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남는다). 그러나 출토 당시 이것을 현악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때까지 한반도에서 고대(古代) 현악기가 나온 적이 없었다.

    ▲ 광주(光州) 신창동(왼쪽)과 경북 경산에서 각각 발굴된 2000여 년 전 현악기. 경북 경산에서 출토된 것이 먼저 발굴됐지만, 광주 신창동 출토품이 현악기임이 밝혀지면서 뒤늦게 경북 경산 출토품도 현악기임이 드러났다. /조선일보DB
    1997년 여름, 광주(光州) 신창동에서 가야금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2000여 년 전의 현악기가 발굴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이 현악기는 길이 77.2cm, 폭 28.2cm로, 줄을 매고 조이는 곳(양의 귀처럼 생겼다고 해서 ‘양이두〈羊耳豆〉’로 불린다)를 갖추는 등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현악기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었다. 당시 발굴을 맡았던 국립광주박물관 역시 이 유물의 성격을 처음에는 몰랐다. 그러나 줄을 맸던 홈을 찾으면서 현악기의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후 신라 토우에 묘사된 가야금 등 현악기와 비교하고, 각종 문헌 자료, 전문가 고증을 거쳐 현악기임을 밝혀냈다.

    그 1년 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공개한 현악기 역시 광주에서 출토된 현악기와 크기와 모양이 거의 동일했다. 2000여 년 전 한반도 남부에는 현악기가 이미 ‘정형화’된 형태로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어 2000년 1월, 국립중앙박물관은 대전 월평산성 발굴품을 보존 처리하던 중 서기 6세기 백제 가야금의 양이두 부분을 찾았다고 발표했다. 이 유물은 사실 1995년 발굴된 것이었다. 1997년 광주 신창동에서 현악기를 발굴하지 않았다면, 그 이전에 이미 발굴됐던 경북 경산과 대전 월평산성의 현악기는 지금껏 ‘정체 불명’의 유물로 남았을 것이다.

    고대에 방어용으로 마을 외곽에 돌린 물길인 환호(環濠)도 ‘유행을 탄’ 대표적인 경우다. 1990년 울산 검단리 청동기유적 발굴 현장. 집터 근처에서 그때까지 ‘배수(排水)시설’로만 생각하던 유구가 나왔는데 파면 팔수록 규모가 커졌다. 발굴을 맡은 부산대 팀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후 환호를 두른 마을유적은 여러 곳에서 잇따라 발굴됐다. 마한(오늘날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 무덤인 ‘물길을 두른 목관묘(주구목관묘·周溝木棺墓)’ 역시 1990년대 초반 천안 청당동유적(서기 2세기 대)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이후 지금까지 모두 1000여기가 발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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