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조한 ‘황제의 밀서’ 내밀지도 못하고…

입력 2007.06.23 00:19 | 수정 2007.06.23 02:54

헤이그 밀사 100주년 (1) 제대로 된 ‘신임장’도 없이 떠난 길

가져간 신임장의 ‘어새’는 위조한 의혹 …
日帝 강압 속 고종은 시인도 부인도 안해
학자들 “구두라도 皇命은 있었다고 봐야”

▲헤이그=유석재 기자karma@chosun.com
지금부터 100년 전. 대한제국의 이준(李儁)과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세 명의 ‘밀사’는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의 제2차 만국평화회의장으로 떠났다. 1907년 4월이었다. 그러나 당시 지구촌을 주무르고 있던 열강은 그들에게 무관심했다. 일본의 방해는 악착같았다. 국운은 백척간두였고, 밀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들이 헤이그에 도착한 날이 6월 25일이었고, 이준은 7월 14일 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본지는 오늘부터 밀사들의 동선을 역으로 추적하며(헤이그←상트페테르부르크←블라디보스토크←부산←서울) 100년 동안 묻혀 있었던 새로운 사실들을 발굴한다. 시시각각 좁혀오는 일제의 압박, 그리고 국제 사회의 냉대와 소외에 휘말려 절망과 울분에 스러져갔던 그들의 절규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1907년 고종이 밀사들에게 준 것으로 알려진 신임장(왼쪽 사진).‘일본이 공법을 위배하며 우리를 협박해 조약(을사늑약)을 체결했다’며 이준·이상설·이위종을 헤이그로 파견해 외교권을 찾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이 문서의‘황제어새’인장을 다른 국서의 인장(오른쪽 위)과 비교하‘제’자의 윗부분과‘새’자의 가운데 부분 등이 크게 다르다. (오른쪽 아래)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네덜란드 헤이그의 상원 의사당 건물(비넨호프). 유석재 기자
◆밀사들이 도착한 100년 전 역은 그대로인데…

20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서 기차를 타면 30여 분 뒤 헤이그 중앙역에 들어선다. 거기서 1㎞쯤 떨어진 곳에는 아직도 100년 전 모습 그대로인 헤이그HS역이 있다.

1907년 6월 25일. 세 사람의 동양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막 헤이그HS역을 나섰다. 전 평리원 검사 이준(48),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37),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20)이었다. 부산항을 출발한 지 2개월 만이다. 수만 리 여로(旅路)의 끝이었다.

만국평화회의는 이미 열흘 전에 개막됐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초라한 ‘드 용’ 호텔에 서둘러 숙소를 잡은 다음날 그들은 ‘황제의 옥새가 찍힌 신임장’을 내보이며 회의 참석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취재 과정에서 만난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의 담당자 하이데브링크씨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뜻밖의 말을 했다. “세 사람이 헤이그에서 황제의 신임장을 제시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지난 주말 ‘드 용’ 호텔 자리에 있는 ‘이준열사기념관’.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에 ‘신임장’의 사진이 정갈하게 걸려 있다. 이준이 이 호텔방에서 죽은 뒤 한 달이 지난 1907년 8월 미국 뉴욕에서 발행된 잡지 ‘인디펜던트’에 실렸던 사진이다. 4월 20일자로 돼 있는 이 신임장은 세 명의 특사를 보내 우리의 외교권을 되찾도록 한다는 내용을 적었다. 왼쪽에는 ‘대황제’라는 글자 아래 수결(手決·자필 서명)이 있고 그 밑에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직인이 있다. 이 사진은 이후 많은 책에 실렸다.



◆신임장의 어새를 위조했다니...

하지만 이 신임장에 찍힌 황제의 인장이 위조됐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서울에서 제기됐다. 서지학자인 이양재 이준열사순국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총무이사는 “신임장에 찍힌 황제의 도장인 어새(御璽)는 진품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그는 “황제의 다른 친서와 비교해볼 때 전각의 글자체가 크게 다르고, 도장을 찍은 게 아니라 붓으로 그려 번진 것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전각 전문가인 정병례 고암전각예술원장도 사진을 본 뒤 “ ‘제(帝)’자 윗부분의 획 길이나 간격이 고르지 않고, ‘새(璽)’자 역시 가운데 뚫린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볼 때 다른 문서의 어새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대단히 어설픈 실력으로 만든 모작(模作)”이라고 단정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내가 보기에도 신임장의 어새와 수결 모양은 이상하다. 그러나 황명(皇命)이 없이 특사 활동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신임장에 고종의 의중이 들어 있었을 것이고, 임무를 구두로 전달하고 나중에 적게 한 백지 위임장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궁궐을 에워싼 채 물샐틈없이 황제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그르칠 경우 뒷감당을 할 수 없었던 고종으로선 최선의 방책이었을 것이고, 촉박한 만국평화회의의 일정에 발을 구르던 밀사들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고종의 ‘특사’ 노력은 좌절되고

최근 쿤 취스테르 네덜란드 레이덴대 교수는 고려대 주최 학술대회에서 “당시 만국평화회의 부총재였던 드 보포트가 밀사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진짜 밀사’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하지만 신임장을 보여 준 것은 아니었다. 이준은 3월 24일 밤 덕수궁 중명전에서 황제와 극비리에 만났지만 신임장을 받지는 못했다. 신임장은 그 뒤 상궁이나 외국인인 헐버트(Hulbert) 박사처럼 몸수색을 덜 받을 만한 인물이 가지고 나온 것으로 추정돼 왔다.

다시 헤이그 현지의 이준열사기념관. 이기항 관장이 찾아낸 러시아측의 초청국 명단 사본이 눈에 띈다. 여기서 한국은 47개 초청국 중 12번째였다. 1905년 을사늑약 직전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고종에게 1906년으로 예정된 만국평화회의의 초청장을 보냈다. 이때 고종은 특사 파견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섰고, 열강의 국가원수들에게 친서를 보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미 외교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황제의 노력은 좌절됐다.

만국평화회의가 1년 연기된 뒤 이번엔 민간에서 특사 파견 문제를 들고 나왔다. 1907년 3월 서울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전덕기·이준·이회영 등의 인사들이 모여 이 문제를 논의했고, 이들 세 사람을 파견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이준이 고종을 만나 ‘특명’을 받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해석이었다.



◆그들은 얼마나 암울하고 절박했을까

그러나 이들은 출국이 임박한 4월 말까지 누군가 대신 가지고 나와야 할, ‘도장만 찍힌 백지 신임장’조차도 여전히 받을 수 없었고, 고종은 러시아로부터 받은 초청장 역시 이들에게 전달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힘없는 황제는 자신이 이들을 보냈다는 것을 시인도 부인도 하지 못했다. 분명한 사실은, 신임장에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급하게 떠났을 만큼 세 밀사의 헤이그행(行)이 대단히 위급한 상황 속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준이 부산항을 떠난 것은 신임장 날짜 불과 사흘 뒤인 4월 23일이었다. 두 달 뒤 헤이그 HS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얼마나 암울하고 절박했을까.

 




한국문서 담당 하이데브링크씨

“밀사들이 쓴 서한엔 명료하고 탁월한 ‘약소국의 항변’ 담겨”

“이준 등 세 사람은 황제로부터 특사로 위임 받았다고 주장했을 뿐, 이곳에서 그 증거물을 제시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헤이그에 있는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의 이리스 하이데브링크(Heidebrink·57·사진)씨는 10여 년 전부터 한국 관련 외교문서들을 정리해 온 담당자다.

그녀는 “밀사들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신임장 관련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당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진 각국 기자들 중에는 그들이 정말로 한국 황제의 명을 받은 대표들인지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하이데브링크씨는 그들 세 명이 을사늑약의 강압성을 명백히 밝힌 서한을 전달한 것은 ‘국제 사회를 향한 마지막 호소’로서 큰 의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세 명의 밀사는 각국 대표에게 보낸 서한에서 “일본의 간교(奸巧)가 우리나라와 우방국가의 사이에 유지되던 우호적 외교관계를 단절케 하고, 항구적인 극동 평화를 위협하는 것을 우리들이 독립국가로서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는가”라고 당당히 외쳤다. 그녀는 “당시 약소 국가들이 작성했던 많은 항의서들을 봐 왔지만, 그처럼 명료하고 탁월한 표현으로 강대국 침략의 부당성을 밝힌 문서는 없었다”고 말했다.

 

1907년 6월 25일, 세 명의 밀사들이 만국평화회의 참가를 위해 도착했던 네덜란드 헤이그 HS역. 1843년에 지어진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유석재 기자
이준 열사가 1907년 7월 14일 순국한 장소인 네덜란드 헤이그의 옛 드 용 호텔. 당시 밀사들이 머물던 이곳은 여인숙 규모의 초라한 숙소였다. 교민 이기항, 송창주씨 부부가 1995년 이곳을 사들여 '이준열사기념관'을 개관했다. /유석재 기자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네덜란드 헤이그의 '비넨호프'. 현재 상원 의사당으로 쓰이고 있는 이곳은 이름난 관광지가 돼 있지만, 바로 100년 전 일본의 침략을 세계에 알리려던 밀사들이 이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던 곳이다. /유석재 기자
네덜란드 헤이그시 프린세가(街) 6,7번지에 남아있는 건물. 1907년 만국평화회의 당시 밀사 중 한 사람인 이위종이 각국 기자들을 상대로 연설했던 곳이다. /유석재 기자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의 한국 관련 문서 담당자인 이리스 하이데브링크씨 인터뷰. /유석재 기자
고종이 헤이그 밀사들에게 전달한 신임장의 국새는 누군가 위조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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