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후] 잠수함 무장공비 출신 이광수씨

입력 2007.05.25 19:25 | 수정 2011.09.14 18:00

"해군 교관된 한국의 새 삶에 만족… 전향자 99% 북한에 미련 없어"
1996년 강릉에 침투한 무장공비 26명 중 유일한 생존자
1999년 결혼해 두 딸 낳고 경남대서 안보정책학으로 석사학위 받아
<이 기사는 Weekly chosun 1957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1996년 9월 19일 강릉 해안에 좌초된 무장간첩 잠수함을 조사하고 있는 해군 장병들. /조선일보


“18일 새벽 잠수함을 타고 동해안을 통해 침투한 무장간첩들은 도주 15시간 만에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날 밤에 달아난 나머지 간첩 8명이 분산, 도주하면서 민가를 약탈하고 우리 군과 교전을 벌이는 등 긴장이 지속됐다. 군경 합동수사대는 잠수함이 좌초된 곳으로부터 서남방 5㎞ 지점인 청학산(해발 337m) 중턱에서 무장간첩 11명이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숨진 간첩들은 모두 머리에 관통상을 입은 채 발견됐는데 10명은 권총을 휴대하지 않은 채 누워 있었고, 나머지 1명은 허리춤에 권총을 찬 상태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발견됐다. 동료들로부터 이탈, 혼자 도주한 이광수(31)는 오후 4시40분쯤 강릉시 강동면 모전리 마을에서 농민들과 얘기를 하다 강릉경찰서 강동파출소 경관 2명에게 붙잡혔다. 찢어진 청색 티셔츠에 흰색 운동화 차림인 이는 생포 당시 38구경 권총 1정과 실탄 9발을 휴대하고 있었다. 이는 경찰이 칼빈 소총을 겨누자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려다 붙잡혔다. 이는 경찰에 연행되자마자 ‘배가 몹시 고프다’며 먹을 것을 요구했다.…”

잠수함 침투 사실을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 1면.

1996년 9월 18일 강릉 앞바다의 잠수함 출현으로 시작된 북한 무장공비 소탕작전은 장장 49일간 전개됐다. 1968년 울진 무장공비 소탕작전의 58일에 이어 두 번째로 긴 기록을 남긴 작전이었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사건 때는 9일, 1978년 충남 광천의 3인조 무장공비 사건 때는 38일이었다. 작전에서 군경은 26명의 무장공비 중 사살 13명, 생포 1명, 사살에 의한 집단 자살 11명 등 25명을 소탕했고, 1명은 월북한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도 아군 11명과 경찰·예비군 각 1명, 민간인 4명이 희생되는 인명피해를 당했다.

당시 침투한 무장공비 중 생포돼 유일한 생존자로 기록된 이광수(42)씨. 사건 발생 11년이 지난 지금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씨는 현재 경남 진해의 해군교육사령부 산하 충무공 리더십센터에서 정훈 교관(4급 군무원·서기관)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충무공 리더십센터는 충무공의 정신을 체득한 긍지를 가진 해군 리더를 양성해 대양 해군을 건설하겠다는 취지에서 옛 충무공 수련원을 모체로 2006년 창설된 교육기관이다. 

잠수함 침투사건 1년 뒤 인터뷰 당시의 이광수씨.

5월 14일 오전 진해 충무공 리더십센터에서 어렵사리 이광수씨를 만났다. ‘무장공비’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남아 우악스런 인상을 예상했는데 직접 만나 보니 전혀 달랐다. 170㎝ 가량의 작달막한 키에 탄탄한 체격, 곱슬머리에 까무잡잡한 얼굴을 한 동네 아저씨 인상의 40대였다. 악수를 건네는 그의 손은 크고 억셌다. 동료 부대원들과 체력 검정 활동을 마친 뒤 바로 샤워를 하고 와 붉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저를 만나러 오셨다고요. 어렵다고 말씀드렸는데….” 앞서 여러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가족들의 안부가 걱정된다”며 한사코 고사했었다. 지난 5월 11일 부대를 찾았을 때 그는 육군 모 부대에 정훈 강연을 나가고 자리에 없었다. 3박4일의 출장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는 역시 “어렵다. 미안하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계속했다. 그는 충무공 리더십센터 당파관(撞破館) 1층 그의 사무실도 공개하지 않았다. “안 되겠다. 나중에….” 그의 고사가 이어졌다. 부대 앞에서 퇴근하는 그를 기다렸다. 부대 안에서는 훈련을 받는 사관후보생들의 군가와 고함이 끝없이 이어졌다. 

침투 무장공비들이 남긴 유류품들.

침투 당시 잠수함 조타수였던 이씨는 동해안 침투사건 이후 전향 의사와 함께 해군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도주하다 산을 넘으면서 강릉시의 모습을 봤다. 번화하고 자동차도 많은 모습은 북에서 듣던 것과는 달랐다. 체포된 뒤에는 서울 남산과 백화점 등을 구경했다. 서울 어느 가정집을 방문했는데 생활 수준이 무척 높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한의 생활상을 두루 보고 난 뒤 북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1997년 해군에 특채로 들어간 그는 해군교육사령부에서 교관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박재규 총장의 권유로 경남대에 입학한 것이 1999년 3월이었다. 당시 학교 측은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씨의 학력을 감안, 3학년 편입을 권유했으나 이씨는 남한 사회의 젊은이들과 캠퍼스 생활을 더 체험하고 싶다며 1학년으로 입학했다고 한다. 낮에는 교관으로, 밤에는 학생으로 주경야독 끝에 2003년 2월 법행정학부에서 학사모를 썼다. 곧바로 행정대학원에 진학해 2005년 8월에는 안보정책학을 전공,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지금도 해군 정신교육 교관으로 북한군의 편제와 실상 등을 가르치고 있다.
남한에서의 학교생활에 대해 그는 만족스러워 했다. 그는 “처음에는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외로운 마음에 여러 차례 방황하기도 했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됐다”면서 “요즘은 탈북자들을 만나면 학교에 가라고 권유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그는 부담스러워했다. 그는 1999년에 임모씨와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두 딸을 두고 있는 상태. “나는 괜찮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좀 그렇잖습니까….” 이씨는 난감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두 딸이 자꾸 마음에 걸리는 표정이다.

앞서 그의 강연록 일부를 입수했다. 강연록에는 북한의 경제난, 햇볕정책, 전향에 대한 생각, 북한의 남침 가능성, 통일은 과연 이뤄질 것인가 등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담겨 있었다.

햇볕정책 이후 본격적으로 보내지는 구호물자들은 어떻게 사용되냐는 질문에, 그는 “현재 북한으로 수송되는 구호품이나 식량은 북측의 요구로 인해 해상으로 운반되고 있다. 육로로 수송할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이목이 집중되기 때문에 빼돌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이들 물자는 전쟁 물자로 우선 비축된다”고 했다.

탈북자 가운데 고위급 간부가 눈에 띄게 적은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했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그만의 카리스마가 없습니다. 김정일은 아랫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평양 거리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차종이 벤츠라는 것, 세계 주류와 담배 수입량에서 북한이 상위에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고위급 간부라는 이들의 호화로운 생활은 우리나라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들이 이런 생활을 포기하고 남한으로 넘어올 이유가 당장 있겠습니까.” 그는 “김일성은 본인의 우상화·신격화로 독재체제를 굳힐 수 있었지만 김정일은 달랐다”면서 “김정일은 피비린내 나는 정치 싸움 끝에 1인자가 됐고, 오직 군사적 억압에 의해 통치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전향 이후 다른 간첩을 만난 적이 있는가 같은 다소 민감한 질문에는 “말할 수 없다”면서 “현재 일어나는 반미 시위나 각종 데모 현장의 일선에서 활동 중인 이들은 대개 수상한 인물이다. 각 사회단체나 정치권에는 공작원 또는 이들에게 포섭된 인물이 상당수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다. 최근 10년간 이들의 활동은 성공적”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밖에 나가서 우리의 적은 누구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미국이나 일본이라고 말한다”면서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는 전향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전향한 이들 중 100이면 99는 북한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 북한의 실상을 알고 난 이후에는 김정일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서라도 북한 생각은 일절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라는 것이다.

그는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실제로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날 체력 검정도 사실 대상자는 아니었지만, 참석해 땀이 흠뻑 날 때까지 뛰었다고 한다. 그는 술도 많이 마시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향은 신의주. 북에 남겨둔 가족들 생각과 이곳에서 어렵사리 꾸린 가족의 신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두주불사를 부르는 것 아닌가 주변 사람들은 걱정과 안타까움을 함께 전했다.

그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김정일이 죽는 순간이 북한의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김정일의 서열 아래로는 서로 간의 견제가 너무 심해서 누구 하나 위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김정일 사후에는 정쟁으로 자멸할 공산이 큽니다. 김정일 생전에 그의 주도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근본이 겁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남북한의 전력 차이, 그로 인한 북한의 열세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한다면, 그 뒤는 나도 모르지만요.”

앞서 1996년 10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 당시 “(남과 북이 전쟁을 한다면) 북에서는 자폭정신을 바탕으로 사상적 우세를 많이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이긴다고 생각한다”고 밝힐 때와는 180도 달라진 얘기다.

“언젠가는 좋은 때가 오지 않겠습니까. 그때 편하게 얘기 하지요. 자꾸 이러시면 제가 많이 곤란해집니다. 저 갑니다.” 짧은 만남. 그는 자신의 싼타페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훌쩍 떠났다.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일지

1996년 9월 14일 05시 북한 잠수함 26명 태우고 함남 퇴조항 출항
                 15일 21시 강릉 해안에 공작원 3명, 안내원 2명 상륙
                 17일 23시 잠수함 좌초 
                 18일 01시 잠수함 버리고 상륙
                 18일 01시35분 택시기사 이진규씨 좌초 잠수함 신고
                 18일 03시40분 군 진돗개 하나 발령
                 18일 16시30분 청학산에서 간첩 11명 자살 주검 발견
                 18일 16시40분 간첩 이광수 생포
                 19일 10시15분 단경골에서 간첩 3명 사살
                 19일 14시10분 칠성산에서 간첩 3명 사살
                 19일 16시10분 괘일재에서 간첩 1명 사살
                  22일 01시30분~06시40분 칠성산에서 간첩 2명 사살
                 28일 06시45분 강릉시 성산면에서 부함장 유림 사살
                 30일 15시18분 강릉시 묵계리에서 기관장 만일준 사살
            10월 5일 10시30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야산에서 정찰조 2명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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