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러시아에 꿔준 돈

    입력 : 2007.05.13 22:45

    1896년 6월 민영환은 대한제국 특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했다. 품 속엔 “차관 300만엔을 빌려 달라”는 고종 친서가 들어 있었다. 당시 조선은 곤궁하기 짝이 없었다. 조선 왕실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일본에서 17만엔을 빌려 쓴 이후 10여 년간 일본한테 수백만엔을 빚진 상태였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조선 왕실은 일본 대신 러시아에 기대보려 했다.

    ▶러시아는 “조선의 경제 상태를 먼저 확인한 뒤 결정하자”면서 차관 요구를 거절했다. 1899년에도 러시아는 “조선 내 광산 개발권을 받는 대신 500만 루블의 차관을 주자”는 마티닌 주한 대사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베리아에 금과 광물이 많은데 구태여 조선까지 가 채굴할 이유가 없다고 한 것이다.

    ▶구 소련이 한국에서 14억7000만달러의 차관을 받아간 건 1991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다. 한 세기 만에 두 나라 신세가 뒤집힌 것이다. 그런데 차관을 받아간 직후 소련 연방이 해체됐다. 구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는 경제가 무너져 모라토리엄(지불유예) 상태에 빠졌다. 그 뒤로도 러시아 경제형편은 한동안 피지 않았다. 러시아는 김영삼 정부 때 장갑차와 헬기 같은 무기로 차관 일부를 갚았을 뿐이다. 그 사이 러시아가 진 빚은 원금과 이자를 합쳐 22억4000만달러로 불어났다.

    ▶한국은 2003년 차관 중 6억6000만달러는 탕감해주기로 러시아와 합의했다. 나머지 15억8000만달러 중 2억5000만달러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현물로, 13억3000만달러는 2007년부터 2025년까지 현금으로 갚는다는 조건이었다. 오는 6월1일이 현금 상환 개시일이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현금 말고 무기로 갚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차관을 깎아주고 상환 만기일을 늦춰주고도 러시아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못 듣고 있다. 되레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라”는 눈 흘김이나 받고 있다. 돈을 빌려주더라도 상대가 갚을 형편이 되는지 따져봐야 한다. 돈을 제때 되돌려 받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훨씬 큰 이득을 보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고맙다는 얘기는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돈을 빌려줘 놓고 돈 안 빌려준 것만도 못한 사이가 돼버리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러시아와의 관계가 좋은 결말을 맺도록 차관을 잘 관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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