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논단] 미리 본 배심원 출석 통지서

조선일보
  •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국민의사법참여연구회 회장
    입력 2007.05.07 22:37 | 수정 2007.05.07 23:19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국민의사법참여연구회 회장
    << 2008년 새해를 맞아 우리 법원은 귀하를 첫 형사재판의 배심원으로 모십니다. 국민들로부터 직접 재판받겠다는 피고인의 뜻을 받아들여 국민참여재판을 개최키로 한 데 따른 것입니다. 귀하의 이름은 주민등록부로부터 임의로 추출되었습니다. 다음주 월요일 9시에 배심원대기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여태껏 우리는 직업법관만으로 재판부를 구성했습니다만, 지난해 ‘국민의 형사재판참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배심원재판의 길이 열렸습니다.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민의 신뢰를 얻는 재판을 위해 더 이상 국민의 사법참여를 늦출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절차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귀하는 먼저 대기실로 와서 배심원재판에 대한 소개를 받습니다. 다음 법관과 검사, 변호인으로부터 질문을 받게 됩니다. 불공평한 판단을 할 우려가 있는지 확인한 뒤 9명의 배심원이 선정됩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길 때에 대비해 예비배심원도 아울러 선정합니다.

    배심원이 되면 귀하는 재판장으로부터 배심원의 할 일과 사건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이어 귀하의 앞에서 검사와 변호인이 증거를 제시하고 주장과 논박을 펼칩니다. 심리가 끝난 뒤, 귀하는 다른 배심원들과 논의를 거쳐 피고인이 진범인지를 평결합니다. 진범이 틀림없다고 확신할 때 유죄평결을 하지만, 석연찮은 부분이 남아 있으면 무죄평결을 내려야 합니다.

    법률을 모른다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필요한 법률지식은 재판장이 알려드립니다. 검사와 변호인도 쉽고 이해 가능한 말을 골라 쓸 것입니다. 모두가 귀하의 눈높이에 맞추려 애쓸 것입니다.

    우리 법원은 귀하의 살아온 경험과 양식을 존중합니다. 귀하의 일상적 체험과 합리적 추론능력은 진실을 파헤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배심원들 사이에 직업, 연령, 성별, 취향은 다양할 것입니다. 다른 경험과 가치관을 가진 분들이 전원일치에 도달할 때까지 토의하고 서로를 설득해야 합니다. 유·무죄를 가리는 판단은 이렇듯 신중해야겠지요. 선입견에 좌우되지 말고, 증거를 통해서만 진실을 가려야 합니다.

    배심제가 자리잡은 다른 나라에서는 배심원 평결이 곧 판결입니다. 다만 우리는 시작 단계인 만큼 어떤 부작용이 나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배심원의 평결은 ‘법원을 기속(羈束)하지는 않는다’고 규정합니다. 직업법관들이 시민배심원과 달리 판결할 여지가 있지요.

    그럼 배심원은 들러리냐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배심원이 전원 일치로 내린 평결을 법관이 어찌 함부로 무시하겠습니까. 대부분의 평결은 당연히 존중될 것입니다. 혹 다른 판결을 내릴 때에는 피고인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고, 판결서에도 이유를 기재합니다.

    배심원으로 불려갔다가 생업에 지장이 올까 걱정되지요. 대개의 사건은 사흘 이내, 길어도 한 주 내로 끝날 것입니다. 여비와 일당도 드립니다. 대신 정당한 이유없이 결석하면 과태료를 내야 합니다.

    이번 배심원재판은 건국 이래, 아니 유사 이래 처음으로 우리 국민에게 열린 기회입니다. 귀하는 죄 없는 자가 억울하게 처벌받는 것을 막아내고, 법원의 기준을 보통시민의 수준에 맞추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귀하는 ‘시민자유의 수호자’이자 ‘민주주의의 등불’로서의 책무를 맡은 것입니다.

    귀하가 배심원으로 봉사할 기회는 평생에 한두 번입니다. 모처럼 제공된 이 배심원재판에의 초대에 기꺼이 응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방법원장 드림 >>

    내년 1월 한 시민에게 배달될 ‘배심원후보자 출석통지서’를 풀어본 것이다. 법원이 국민에게 보내는 이 정중한 초대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자. ‘국민에 의한 재판’에 들어서는 귀하의 활약을 통해 ‘그들만의 재판’은 ‘우리 모두의 재판’으로 바뀌는 기적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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