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국의 무라카미 류’ 를 찾아서…

조선일보
  • 이규형 영화감독
    입력 2007.03.30 22:59

    이규형 영화감독
    ‘무라카미 류’. 한국에서도 꽤 인기 있는 일본 대중문학작가이자 요즘 화두가 되는 일류(日流)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30년 전 그의 데뷔작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내겐 충격이었다. 친구들끼리 몰래 돌려 읽으며 느꼈던 소설의 전율과 흥분. 그러나 그 소설 내용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한국에선 섹스 소설이라 출판 금지된 작품이 일본에서는 ‘아쿠타가와’ 상이라는 최고 권위 문학상을 받고 대중들 사이에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것이다. 무라카미 류는 순식간에 스타 작가로 열도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나는 혼동스러웠다. 한국 쪽 판단이 맞는지 일본 쪽 판단이 맞는 것인지….

    일류(日流)라는 말이 떠오른 건 최근 한국 드라마와 영화들이 일본 원작의 판권을 구입해 제작되는 일이 잦아지면서부터다. 그러나 냉철히 생각해 보면 이미 일류는 지난 수십년간 우리 문화계를 잠식하고 있었다. 지금 기성세대들은 어린 시절 ‘황금박쥐’, ‘은하철도999’ 등 숱한 일본 만화영화를 아무 거부감 없이 시청했다. 그냥 이 작품들이 우리 것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만화, 영화, 방송, 광고는 숱한 아이디어를 일본 작품에서 거리낌없이 도용했고 어떤 경우는 스토리 하나 바꾸지 않고 주인공만 한국 이름으로 바꿔 우리 것인 양했다. 요즘 일류 현상이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저작권 개념이 충실해지고 인터넷으로 세계가 하나로 통하게 되면서 어떤 것이 일본 원작이고 몇 작품이나 계약돼 한국화되는지가 선연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특히 요즈음 일본 만화, 드라마, 영화의 원작 판권을 구입해 리메이크한 작품이 잇따라 히트하면서 비판과 걱정의 수위가 높아졌다. 일본 원작을 리메이크한 드라마 ‘하얀거탑’의 히트 이후 국어사전에도 없는 생소한 단어 ‘거탑(巨塔)’이란 말이 대중들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떠돌고 있는 것을 보면, 마치 양파를 ‘다마네기’, 단무지를 ‘다쿠앙’이라 부르던 낯뜨거운 과거가 생각날 지경이다. 아직도 우리 말에는 일본식 조어의 찌꺼기가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가? 그런데 이런 일본 원작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인해 자정(自淨)되기 시작했던 일본식 표현이 다시 급증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일본 것이니 무조건 배척하자며 민족주의 타령을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창조에 요구되는 고통과 투자를 회피하고 우선 당장 써먹기 쉽고 달콤하다고 남이 만들어놓은 것에 편승하려는 한, 우리의 창조력은 고갈되고 끝내 그들의 정신적 종속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과 정서를 반영한 재미있고 의미있는 스토리를 만들어 관객을 모으는 것은 이 시대 문화예술인들에게 주어진 책무다. 도용이나 표절이 아니라 떳떳이 밝히고 하는 ‘리메이크’라고 해서 그들의 직무유기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근대 이후 많은 지적 생산을 일본에 빚진 한국이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일본의 대중문화를 베껴 관객(시청자)을 모으려고 하는 수준이라면 부끄러움을 넘어 한심한 일이다.

    결국 대책이 중요하다. 그 해답을 30년 전 ‘무라카미 류’에게서 찾을 수 있다. 우리도 젊은 스타 작가를 다양한 방식으로 발굴해내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언론, 정부, 대기업들이 합심해야 한다. 재미있는 작품을 쓰고, 그리고, 만드는 젊은 친구들에게 깜짝 놀랄 만한 거액의 보상을 안겨줘야 한다.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 재능이 있지만 돈이나 명예 혹은 사회적 지위 때문에 다른 분야로 가려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붙잡아야 한다. 이들이 ‘5년, 10년을 노력해서라도 저 상만 타면 내 청춘은 성공이다’라고 여길 수 있는 보상체계가 있어야 한다. 그런 상이 생겨나 시간이 지나면 지금처럼 껍질뿐이 아닌 탄탄한 내실을 갖춘 진정한 한류(韓流)현상이 다시 일어날 것을 확신한다. 인적자원이 넘치는 대한민국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꼭 상을 타지 못했어도 후보가 됐던 많은 사람들, 다른 분야로 갈 뻔하다가 다시 창작에 발길을 돌린 유능한 젊은이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지금 한국 대중문화계를 뒤덮고 있는 일류 현상을 해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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