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한국의 고3

조선일보
  • 강인선 논설위원
    입력 2007.03.13 22:55 | 수정 2007.03.14 05:48

    ‘자정에 점호를 하면서 기숙사 방에 불이 꺼지고 나면 우리들은 삼삼오오 복도로 나오거나 화장실에 가서 새벽까지 공부했다. 기숙사 방 전등을 다시 켜고 공부할 때는 들키지 않으려고 별짓을 다했다. 불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문틈을 수건으로 메우고 테이프를 붙였다. 창문은 검정 골판지로 도배했다. 다른 친구들도 책상 주위에 이불로 방어벽을 치는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부산 과학영재고 학생의 수기다. ▶강원도 횡성의 민사고 기숙사 방에 들어가 보면 책상마다 13와트짜리 휴대용 랜턴이 놓여 있다. 기숙사 불이 꺼지면 켜놓고 공부하려는 것이다. 여느 고3도 그리 다르지 않다. “방학 동안 매일 12~13시간씩 공부, 휴대폰은 밥 먹는 시간에만 켜놓고, 집과 독서실만 왔다갔다 했다.” “밥 먹을 땐 수학 공식, 걸을 땐 단어장과 한자를 외웠다. 횡단 보도 신호를 기다릴 때도, 엘리베이터에서도 공부한다.” 인터넷 수험생 사이트에 올라온 고3들의 생활이다. ▶얼마 전 한 병원 연구소가 고3 594명의 수면시간을 조사해보니 63%가 5시간 미만이었다. 한림대 일본학과 사이토 아케미 교수는 치열한 입시 전쟁터를 둘러보곤 “장렬하다”고 했다. 일본 고교에서도 10년 근무했지만 일본의 입시 열기는 한국의 상대가 못 된다고 했다. 그는 ‘한국견문록’에 “한국 대입 수험 공부의 혹독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서너 시간 자고 도시락을 두 개 싸 들고 학교에 다닌다”고 썼다. ▶벨기에인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와 외국인학교가 아니라 대일외고를 다닌 소녀 얘기가 어제 조선일보에 실렸다. 에밀리는 새벽 6시30분에 별 보고 등교해 밤 10시 별 보며 하교하는 생활을 했다. 교과서를 달달 외웠고, 자정까지 교육방송을 봤고, ‘수학의 정석’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붙들고 공부했다. 하버드대에 원서를 낸 에밀리는 “누구든 한국에서 고3 생활을 해내면 이 세상에서 못할 게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지독하게 공부해 세계 최악의 입시 지옥에서 살아남은 고3들이 대학에선 흔히 공부를 놓아버린다. 대학에 들어가기는 어려워도 다니는 것은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계인 해럴드 고 예일대 법대 학장은 “미국에서 대학 입학은 성취가 아니라 진짜 공부의 시작”이라고 했다. 우리는 대학 합격을 ‘성취’라 생각하기에 한국 고3이 지닌 세계적 경쟁력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하고 묵혀버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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