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주막 '삼강주막'의 정취

입력 2007.03.03 13:30 | 수정 2007.03.03 13:31

100년 풍상 버텨온 예천 ‘삼강주막’
주모는 갔어도 취흥(醉興)은 남아…
숫자 못 읽는 주모, 벽에 금 그어 외상 표시…
경상북도가 민속자료로 지정해 복원키로
<이 기사는 주간조선 [1944호] 에 게재되었습니다>

안개가 피어오른 2월 21일 새벽, 낙동강 길 700리 '조선의 마지막 주막'이라 불리는 삼강주막의 모습.

벌써 100여년이 흘렀구려. 세월은 참말 무상한 것 같으이. 이곳은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자리잡은 ‘삼강주막’이라오. 낙동강·내성천·금천의 3개 강물이 합치는 곳이라 해서 그렇게들 불렀지. 주막이 생긴 것은 1900년대 초반. 정확한 날짜는 알지 못한다오. 그저 학자들이 “낙동강 700리 길을 통틀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시대 전통 주막”이라며 그렇게 추정할 뿐이라오.

주막 한 켠엔 멋들어지게 늘어선 아름드리 나무가 한 그루 있소. 사람들이 정월 보름날 제사를 지냈던 이 나무 수령이 200년이라니까, 그간 주막이 겪은 풍상을 어림할 수 있을 거요.

낙동강길 700리 '조선의 마지막 주막'으로 꼽히는 삼강주막 유옥련 할매의 생전 모습. /사진제공 경북도청

‘조선의 마지막 주막’을 지켜온 이는 유옥련(兪玉蓮) 할매라오. 1917년에 태어난 할매는 꽃다운 나이인 열아홉에 주모로 들어앉아 2005년 10월 9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약 70년간 이 주막을 지켜왔소. 마을 노인은 “할매의 고향은 옆 동네 우망리”라면서 “원래 남의 집 일을 봐 주다가 네 살 위인 뱃사공 배소봉(裵小鳳)씨와 1932년 혼인해 주막을 맡았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이 주막은 할매가 맡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거라오.

'마지막 주모' 유옥련 할머니가 벽에 그어 놓은 외상 금

옛날엔 정말 좋았다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삼강리’는 상인이 흥청대는 요충지였소. 이곳은 대구와 서울을 잇는 단거리 뱃길로,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소금배와 집산된 농산물은 죄다 이곳으로 모여들었다오. 마을과 주막은 상인, 뱃사람, 나들이객, 시인묵객으로 늘 붐비곤 했지. 한창일 땐 소 6마리가 들어가는 커다란 배가 오가곤 했다니까, 나루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거요.

할매는 글도, 숫자도 알지 못했다오. 그래서 한 잔을 외상하면 담벼락에 짧은 금을 긋고, 한 주전자를 외상하면 긴 금을 세로로 그어 놓았다오. 그러다 외상값을 죄다 갚으면 옆으로 길게 금을 그어 외상을 지웠지. 말 그대로 외상을 ‘그은’ 거라오. 주막 주방 옆 담벼락엔 할매가 그어둔 외상 금이 여전히 남아 있다오.

비록 술장사를 했지만 할매는 단아하고 정직했다오. 마을 노인은 “인정 있고 인심 후했던 주모”로 할매를 기억한다오. 할매는 옆 동네 술도가에서 탁주를 받아다 팔았소. 당시엔 안주래봐야 어쩌다 멸치나 콩자반이 곁들여질 뿐, 평소엔 소금이 대부분이었다오. 동네 노인 정수흠(69)씨는 “돈이 없을 땐 쌀 같은 곡물을 들고 와서 술을 받아먹곤 했다”며 “어쩌다 돈이 생겨 외상을 그으면 한두 잔 더 주기도 하고, 돈이 떨어지면 또 외상을 먹기도 하고 그랬다”고 하더군. 20~3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대여섯 달에 한 번, 어떤 땐 1년에 한 번 꼴로 외상을 갚았다오. 그러다 보니 미처 못 갚은 외상도 많았는지, 주막 흙벽엔 채 지워지지 않은 수십 개의 금이 남아 있다오.

할매의 삶은 고단했다오. 강변에 있긴 했지만 주막엔 의외로 먹을 물이 귀했소. 그래서 할매는 매일 마을로 가서, 동이에 우물물을 받아 머리에 이고 왔소. 50여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부터 매일을 그렇게 5남매를 키웠으니, 고단할 만도 했을 거요. 할매는 10여년 전부터 막걸리 대신 소주나 과자를 주로 팔았는데, 소주 한 병에 1000원을 받았다니 수입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오. 전국의 대폿집을 순례해 ‘사람아 바람아, 그냥 갈 수 없잖아’란 책을 쓴 화가 사석원씨는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주모”로 할매를 기억한다오. 사씨는 할매가 작고하기 2년 전인 2003년 11월 ‘삼강주막’을 찾았는데, 그게 그만 마지막이 되고 말았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옛날 같은 정취를 느끼기 힘들다오. 마을을 가로질러 1970년대에 도로가 뚫리고, 현대식 다리인 삼강교가 마을과 주막 사이를 가로막고 들어선 바람에, 강 따라 소담하게 자리잡은 동네 모습이 훼손되고 말았소.

 동네 노인은 “다리가 뚫리던 2004년 4월, 평생 눈물을 보이지 않던 할매가 봉당마루에 앉아 쓸쓸히 눈물 훔치는 모습을 봤다”고 하더이다. 주막을 감돌며 시원하게 흘러가는 낙동강 허리를, 다리가 동강 막아버렸으니…. 도로가 생기면서 인적도 끊겨, 주막을 찾는 사람도 하나 둘씩 사라지고 말았다오.

주막은 원래 짚단에 진흙을 섞어 지었는데, 1934년 ‘갑술홍수’ 때 물에 잠기면서 한 번 보수를 했다오. 짚단을 얹어 놓은 원래 지붕도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1년 슬레이트로 바뀌어 버렸소. 하지만 옛 모습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라오. 진흙을 바른 담장, 구들장, 아궁이도 여전하고 할매가 쓰던 토끼굴 같은 부엌도 여전하니 말이오.

경상북도는 이 주막이 가진 지역 문화·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해 2005년 12월 26일, 이곳을 민속자료 134호로 지정했소. 무려 12억원을 들여 이곳을 문화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니, 옛 정취가 살아나길 기대해 봄직할 거요.

하지만 아쉬운 건 있소. 자식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할매가 쓰던 그릇이니 반짇고리, 옷가지, 이불 등을 죄다 태워버렸다오. 하지만 너무 무상해 하진 마시라오. 삶이란 게 우리 같은 질그릇의 삶이건 사람의 삶이건, 세상에 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말이오. 누가 또 알겠수? 문화공원이 조성되면 누군가 흙을 빚어 할매가 쓰던 우리네 그릇들을 다시 복원해줄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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