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터뷰] 프로입문 50년 '영원한 국수' 김인 9단

조선일보
  • 이홍렬기자
    입력 2007.02.24 00:31 | 수정 2007.03.29 16:59

    “바둑은 학문·道·예술·게임 합친것 그래서 어렵고 인생의 지침이 되죠”

    ‘김 국수’가 애칭인 김인 九단. 인물도 기풍도‘중후함’그 자체로 통한다. 정경렬기자

    ‘영원한 국수’ 김인(64) 九단에게 올해는 여러모로 뜻 깊은 해다. 프로기사 50년 차를 맞은 데 이어 최근엔 자신의 지난 세월을 총정리한 전집(全集)이 출간됐다. 한국 바둑 여명기였던 58년 프로에 투신, 최고 엘리트 코스를 거쳐 독보적 전성시대를 구가한 그의 바둑 반생은 곧 우리 바둑계의 도약 과정이었고, 전집은 그 발자취의 총정리에 해당한다. 자신의 주요대국 기보(棋譜) 312국을 세 권에 담으면서 그중 일부에 직접 해설을 첨부하는 작업을 마친 김 九단은 무척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왕년의 국수(國手)는 한국 바둑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오늘의 바둑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만나봤다.

    ㅡ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요즘도 술을 즐기신다지요.

    “좋은 의사선생님을 만난 덕택에 그럭저럭 버티고 있습니다. 승부의 긴장감이란 엄청난 것이어서 대국 후 술에 의존하는 습관이 평생 계속됐죠. 요즘엔 폭음은 피하고 있습니다.”

    ㅡ전집이 출간돼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습니다.

    “기보를 놓아보노라니 옛 전장(戰場)을 다시 찾은 노병 같은 기분이 되더군요. 조남철 선생님 이후 두 번째라니 영광이죠. 얼마 전 농심배 대회에 들렀을 때 많은 걸 느꼈습니다. 이창호 군, 정말 대단해요. 두 판 모두 엄청나게 까다로운 바둑이었죠. 우리 때는 일본 유학이 대성의 필수조건이었는데…. 후배들이 세계를 연패(連覇)하고 있으니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ㅡ김국수님 전성기 때는 시중에 온통 일본 바둑 책 해적판만 나돌았던 걸로 기억됩니다. 요즘엔 일본 프로 지망생들이 오히려 한국에 연수하러 오더군요. 무엇이 이런 반전(反轉)을 가능케 했을까요?

    “저는 시스템의 차이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일본이 전통에만 집착하다 경쟁국들에 추월당한 거죠. 한 예로 일본은 아직도 예선을 단위(段位) 별로 차등 실시하는데, 이래선 신예들이 초1류와 만날 기회가 봉쇄돼요. 반면 한국은 연구생 제도 등 훌륭한 경쟁 시스템 구축으로 도약의 기틀이 마련됐죠. 여기에 조훈현 이창호 등 천재들이 출현해 기름을 부었습니다.”

    ㅡ바둑계는 1인자 계보로 조남철 九단과 김국수, 그리고 조훈현 이창호 九단 등 네 분을 꼽습니다. 김국수께서도 동의하십니까.

    “내 또래 이상 나이의 기사들은 바둑을 취미로 배워 프로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죠. 바둑이 호구지책이 못 되던 시절이니까요. 유일한 예외가 조남철 선생님입니다. 그분은 출발 때부터 바둑으로 구국(救國)한다는 사명감 아래 평생을 헌신하셨죠. 한편으로 조훈현 이창호 등은 한글보다 바둑을 먼저 배워 직업으로 택했고 대가의 경지에 들었습니다. 어찌됐건 저는 다른 세 분에 비해 해 놓은 게 없어요. 내가 1인자 계보에 끼인다는 게 부담스럽고 부끄럽습니다.”

    “우리때엔 일본가야 대성했는데 요즘 후배棋士들 자랑스러워…

    인터넷 대국선 마우스 실수 빈발 지금은 ‘세력’보다 ‘실리’ 강조”


    ㅡ20세기 중반 사랑방 소일거리에 불과했던 한국바둑 입장에서 일본은 시급히 따라잡아야 할 목표였습니다. 김국수는 해방 후 첫 일본 유학생으로 선진 문물을 흡수해온 선교사였던 셈인데, 당시 한일 양국 바둑 실력 차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네가 프로 4단이지만 일본에 가면 아마추어 실력’이라고 해 큰 자극이 됐죠. 일본 도착 후 2점 시험기를 거쳐 3단을 받았는데 일본 기사들이 ‘특혜’라며 반발이 심했어요. 그러나 그들을 상대로 약 8할 대 승률을 올리자 그제서야 잠잠해졌죠. 오다케(大竹英雄) 린하이펑(林海峰) 등 신예 강자들에게도 기죽지 않고 맞섰던 걸로 기억합니다.”

    ㅡ우칭위안(吳淸源) 선생은 ‘바둑은 조화(調和)’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노우에(井上因碩)는 바둑을 ‘운(運)의 기예’라고 정의했죠. 김국수의 바둑 정의를 듣고 싶습니다.

    “바둑은…결국 수리(數理)이자 계산 아니겠습니까? 조화라는 것도 정확한 계산이 나온 뒤에야 진퇴가 결정됩니다. ‘빵때림 30집’이라지만 그 정확한 크기는 아무도 모르죠. 이노우에가 말하는 운(運)은 최선을 다한 다음의, 최고의 경지에서 한 말입니다. 행운권 뽑기 식의 운하고는 구별돼야죠.”

    ㅡ정석(定石)이 끝없이 명멸하고 신수(新手)는 잇달아 탄생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바둑의 수(手)도 진보하나요? 손기정 선생의 베를린 올림픽 우승 기록은 고작 ‘2시간 29분대’였습니다. 바둑은 어떻습니까.

    “바둑의 수도 계속 발전되며 기보 수준도 과거보다 현재가 월등합니다. 이기기 위해 새 수법을 꾸준히 개발하니까요. 그리고 갈수록 이론을 떠나 실전적으로 진화하죠. 흥미로운 것은 바둑관(觀)의 반복 교대 현상입니다. 유행에 따라 실리형과 세력형 포진이 엎치락뒤치락하는데, 요즘은 실리 강조 시대에 해당합니다.”

    ㅡ바둑이란 학문, 도(道), 예술, 게임 중 어느 분야에 속할까요? 요즘엔 ‘스포츠론(論)’도 꽤 힘을 얻고 있습니다만.

    “어렵습니다. 각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달렸죠. 바둑은 그 모든 속성을 고루 함유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지침이 되는 거죠. 저 개인적으론 기도(棋道)란 말에 가장 이끌립니다. 다만 스포츠론(論)은, 올림픽 편입 등 실익적 측면은 있겠습니다만 본질적으론 좀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ㅡ바둑 팬들에겐 요즘 인터넷 바둑이 대 유행입니다. 가상 공간에서 대국해보신 적이 있는지요?

    “할 줄은 압니다. 그런데 그, 마우스 미스라고 합니까? 실수가 너무 빈발해 잘 안 둡니다(웃음). 어린 후배 1명이 신청해 와 둔 적이 있는데, 내 실착이 너무 어처구니 없었는지 추궁을 않더군요. 훗날 공식 대국에서 그 친구를 만났을 때 ‘자네 오늘은 진짜 혼내주겠다’고 엄포를 놓고 시작한 기억이 납니다.”

    ㅡ요즘 한국 바둑이 경쟁국들로부터 맹추격을 받고 있습니다. 원인과 처방, 한 말씀씩 해 주시죠.

    “우리는 완전히 노출됐고 상대는 철저히 연구한 결과지요. 한국이 아직 세계 1등국 지위를 가졌을 때 그 과실을 챙겨야 합니다. 그러려면 한국기원뿐 아니라 정부가 나서 우리 바둑을 해외에 심는 적극책이 필요해요. 아직도 외무성, 문부성, 실업인들 할 것 없이 바둑을 국기(國技)처럼 육성하는 일본이 부럽습니다. 바둑만큼 나라 체면을 세워주는 분야가 또 있습니까?”

    김인 九단은

    김인을 향한 바둑계의 평소 호칭은 ‘김 국수’다. 기풍은 ‘중후(重厚)’ 두 자로 압축된다. 묵직하고 두텁다는 뜻인데 대국 자세나 성품과도 썩 잘 어울린다. 1943년 전남 강진 출생. 입문 1년 만에 군기(郡棋)에 올랐고 3년 뒤인 58년 프로가 됐다.

    63년 3월 도일, 세계 최고의 바둑 도장을 운영하던 기타니(木谷實) 문하에서 1년 8개월간 수업했다. 귀국 직후 ‘도일 유학 2호’ 김인이 ‘1호’ 조남철의 국수 아성을 허물면서 새 시대가 열린다.

    그는 73년 최고위전에서 10세 연하 조훈현에게 바통을 넘기기까지 10년 남짓 무적(無敵) 시대를 구가했다. 특히 61년엔 90.9%(20승 2패)의 승률을 남겼는데, 연간 승률 9할대 작성 기사는 현대바둑 60년 사상 김인뿐이다. 통산 타이틀 획득 수 30개. 타이틀전 자체가 귀했던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초인적 ‘독점’의 역사였다.

    그는 돌을 빨리 거두기로도 유명하다. 전성기 시절 내용이 맘에 안 들면 유리해도 패국을 선언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김인은 승부사라기보다 예인(藝人) 또는 구도자 성향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서도(書道)에도 조예가 깊으며 술을 누구보다 아껴 주선(酒仙)으로도 불린다. 지난해 위암 수술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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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년대 한국바둑을 호령했던 김인 9단. 지금은 한 걸음 뒤로 물러갔지만 여전히 한국 바득에 대한 애정은 깊다. /정경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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