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만화 ‘먼나라…’의 실수가 일깨운 것

  • 신문영 베리타스북스 주간

    입력 : 2007.02.19 22:48 | 수정 : 2007.02.19 23:20

    신문영 베리타스북스 주간

    세계 여러 나라의 모습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해 베스트 셀러에 오른 만화 ‘먼 나라 이웃 나라’ 미국편에서 9·11 테러사태를 불러일으킨 배경으로 돈과 언론을 쥐고 있는 유대인들의 영향력을 시사한 부분이 결국 수정될 것 같다. 만화를 그린 이원복 교수와 책을 펴낸 출판사가 “유대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 사과를 드린다” 고 유감을 표했다.

    이번에 ‘먼 나라 이웃 나라’를 문제삼은 사이먼위젠탈센터는 일본에서도 문예춘추사에서 펴내던 시사 교양 월간지 ‘마르코 폴로’를 폐간시킨 전력이 있다. 1995년 일본의 한 신경의학자가 이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나치정권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 수용소의 악명 높은 가스실은 부풀려진 허구일 수도 있다는 내용을 썼다.

    25만 독자들이 읽는 ‘마르코 폴로’는 즉각 유대인 단체들로부터 항의를 받았고, 이스라엘 정부도 주일대사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마르코 폴로’ 편집주간은 유대인들의 주장을 대변하는 반박기사를 싣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실력 행사에 나선 유대인 단체들은 굵직한 광고주들을 움직였다. 카르티에, 폴크스바겐, 미쓰비시, 필립 모리스 등의 기업이 ‘마르코 폴로’에 실으려 했던 광고를 취소했다. 또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그 기사를 적절치 못한 내용으로 규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결국 이 사태는 할복 자살로 끝났다. 사이먼위젠탈센터를 대표하는 랍비 쿠퍼와 문예춘추사 다나카 사장이 공동 회견을 열고 ‘마르코 폴로’를 폐간하고 편집진을 전원 직위 해제한다는 발표를 했다.

    내가 1995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공부할 때였다. 아르바이트로 과외 공부를 가르치던 집이 마침 유대계 미국인 가정이었는데,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부자 동네에 집이 있었다. 토요일 오후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미국인들이 집에서 쓰지 않는 물건을 팔고 사는 차고세일 표지가 있어 들렀다. 마침 스피커스탠드로 쓰기 알맞은 탁자 두 개가 있어 헐값에 샀다. 그런데 탁자에 새겨진 문양이 성경을 소재로 한 그림책이나 영화에서 본 듯해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이거 혹시 이스라엘에서 온 탁자인가요?”라고 물었다. 순간 그 아주머니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하며 “그걸 어떻게 알았죠? 그걸 알아서 어쩔 건데요?”라며 신문하듯 물었다. 나는 단순히 궁금해서 그랬는데 그 아줌마는 그게 아니었다. 내가 과외 공부를 가르치던 은행장 부부 역시 지위나 재산으로 따지자면 차고 넘쳤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어딘가 불안한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인텔 창업자 3인방 가운데 한국에도 잘 알려진 앤디 그로브는 헝가리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난민 신분으로 미국에 유학을 가 자수성가한 유대계 미국인이다. 그의 극적인 성공 스토리를 그린 책 ‘거인 앤디 그로브’ 첫 장에 보면 그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부다페스트에 가고 싶지도 않고,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고 있다. 앤디 그로브뿐 아니라 미국에서 성공한 수많은 유대계 석학, 은행가, 기업가, 영화인들은 지금도 불안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녀들에게 경각심을 늦추지 말라고 가르친다. 2000년 넘게 핍박을 받은 역사를 뼛속 깊이 새겨 세계 어느 곳에서건 유대인들을 꼬집어 표현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한국 사회에서 유대인들의 이미지는 뛰어난 두뇌를 가졌고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 그러나 중동의 화약고 같은 정세에 일말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시야로 주의 깊게 보면 그들의 아픈 상흔(傷痕)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지금 미국 의사당을 울리고 있는 위안부 청문회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유대인들의 이유 있는 문제 제기를 이해할 수 있다. 책 내용을 고치겠다고 신속하게 결정한 것은 적절한 대응이다. 나아가서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한국 사회가 지평선 너머 다른 나라와 사람들을 좀 더 깊게 이해하고 그들에게 한국이 가까운 나라, 매력적인 나라로 비쳐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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