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시안게임 통산 최다 동메달리스트(11개)인 한규철은“대표 생활 10년을 개운하게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주머니에서 메달이 주렁주렁 달려 나왔다. 죄다 구릿빛. 수영 국가대표 한규철(25)은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개인혼영 200m와 400m, 계영 두 종목(400·800m)에서 동메달만 네 개를 땄다. 7일 도하 하마드 아쿠아틱센터에서 만난 그는 “집에 가면 동메달이 일곱 개 더 있어요. 저보다 아시안게임 메달 많이 딴 사람 없을걸요”라며 씩 웃었다.

한규철은 1998년 방콕, 2002년 부산대회에 이어 이번 대회까지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만 11개를 땄다. ‘넘버 스리’ 징크스랄까. 연금 점수(아시안게임은 금10점·은2점·동1점) 11점. 메달 11개를 따고도 연금 지급에 필요한 최소 점수(20점·월 20만원)조차 채우지 못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와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얻는 ‘병역 특례’ 혜택도 못 받았다. 한규철은 6일 200m 개인혼영 결선에 나가면서 ‘아시안게임 마지막 레이스구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2분02초56으로 3위. “전국체육대회 때보다 기록이 나빴습니다. 동메달 대신 다른 색깔을 노렸는데….” 한숨이 지나갔다.

어릴 때는 ‘천재’ 소리를 들었다. 아주중 3학년이던 1996년 처음 태극문양을 달았고, 1998년 1월 호주 퍼스에서 열렸던 세계선수권 접영 200m에선 한국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결선(A파이널)에 올랐다. 비록 한 명이 실격, 7명이 펼친 레이스에서 7위를 했지만 국내에선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세계 무대에서 메달 따는 것도 금방이라고 자신했던 시절이었죠.”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 세 개에 그치고, 1999년 호주 범태평양 대회에서 실격패하면서 슬럼프에 빠졌다. 한규철은 “발가락이 부러지는 등 부상이 이어졌고, 시드니올림픽 땐 예선에서 떨어졌다”며 “뭘 해도 안 되는 것 같아 좌절했다”고 기억을 되살렸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이후 자유형 중·장거리 수영으로 어깨 부상 재활 훈련을 하다 아예 주 종목을 자유형으로 바꿨다. 금세 아시아 1~2위권의 기록이 나왔다. 2002년 월드컵 시리즈 자유형 1500m에서 금메달 두 개를 따내자 다시 ‘한국 수영의 간판’이란 찬사를 들었다. 하지만 2002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또 동메달만 네 개.

“어중간한 1등이면서 자만했던 거죠. 한 종목만 집중적으로 팠어야 했는데.” 한규철은 경기고 8년 후배인 박태환을 보면서 느끼는 게 많다고 했다. “시작은 제가 더 좋았어요. 잘나갈 때 태환이처럼 수영에만 몰두했어야 하는데….”

‘전성기가 언제였느냐’고 묻자 한참 만에 “언제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성기를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가장 기쁘게 수영했을 때는? “이번 아시안게임은 즐거웠어요. 후회 안 남기려고 최선을 다했거든요.” 한규철은 “동메달 열한 개를 따면서 배운 게 많다. 앞으로 살아가는 데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 금메달’, 예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