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구역 240명중 절반 죽어나가

조선일보
입력 2006.08.18 00:37 | 수정 2006.08.18 03:06

풀베기땐 하루 800㎏ 못채우면 배급량 줄여… 허기져 일하다 餓死
하루 1시간 겨우 잘때도… 쥐·뱀·벌레 안먹은게 없어
탈출하다 잡히면 공개처형

北요덕수용소 생활을 증언하는 탈북자 김은철씨. /채승우기자 rainman@chosun.com
1999년 11월 중국에서 러시아 국경을 넘다가 체포된 뒤 중국을 거쳐 강제 북송됐던 ‘7인의 탈북자’ 중 한 명이 극적으로 재탈북해 국내에 입국했다.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김은철(26)씨는 작년 7월 북한을 탈출해 올 3월 서울에 왔다. 국내 정착을 위해 하나원 교육을 받고 현재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김씨가 처음 북한을 떠난 것은 99년 4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무산을 떠나 중국으로 들어갔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연길교회에서 탈북 동료 6명과 만나 한국행을 결심하고 중·러 국경을 넘다가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체포됐다. 이때 이들의 존재가 처음 국제사회에 알려지고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유엔고등판무관(UNHCR)으로부터 난민 판정까지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국제 관례를 무시하고 김씨를 포함한 ‘7인의 탈북자’를 중국으로 돌려보냈고, 중국 당국이 이들을 강제 북송하려 하자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6명은 현장에서 붙잡혀 북송되고, 김씨만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김씨도 2000년 1월 잠시 북한으로 들어 갔다가 고향인 무산에서 체포됐다. 그후 김씨를 포함한 6명은 북한 정치범수용소로 악명높은 함남 요덕수용소에 수용됐다. 김씨가 2000년 6월에서 2003년 7월까지 3년1개월 동안 요덕수용소에서 체험한 얘기들을 구술을 받아 정리했다. 김씨는 가장 최근에 북한의 수용소 생활을 겪은 사람이다.

2000년 1월 16일 고향인 함북 무산의 친구네 집 근처 산막(화전민들이 지어 놓은 임시 숙소)에 숨어 있다가 보위부에 붙잡혔다. 잡힐 때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아 6군데가 터졌다. 보위부에서 중국에서 한국사람 누구 만났느냐, 기독교 만났느냐, 어떤 잡지를 보았느냐, 간첩행위를 했느냐 등을 집중해 물었다. 예상된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닥치는 대로 몽둥이로 때린다. 각목을 뒷무릎에 끼우고 앉아 있게 하는 고문, 달궈진 쇠철판 위에 무릎을 꿇게 하는 고문 등도 당했다.

보름을 버티다 무조건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해 보위부 요원이 묻는 대로 모두 맞다고 했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말했다. 비판서(자술서) 쓴 것이 300장이 넘는다. 조사 후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줄 알았는데 요덕수용소로 끌려갔다. 여름 햇볕이 따가운 2000년 6월이었다.
최근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뮤지컬 '요덕스토리' 중의 한 장면. /최순호기자
◆탈북 동료 모두 수용소서 만나

탈북 동료 6인 중 미성년자인 김승일을 빼고 모두 수용소에서 만났다. 김승일은 조사과정에서 죽은 것 같았다. 방영실(방영순으로 잘못 알려짐)은 조사과정에서 너무 매를 많이 맞아 몸이 말이 아니었다. 수용소에 온 후 이름만 병원이지 시설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냥 앉아 있었다. 남편(호영일)이 그를 살리려고 애썼지만 끝내 미라처럼 말라 그해 9월에 죽었다. 우리는 소달구지에 싣고 가 묘지골(수용소의 무덤을 이렇게 부른다)에 묻었다. 김광호는 종신 수용소로 끌려간 후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나머지 3명은 지금 출소해 각자 고향에서 살고 있다.

◆최악의 노동 할당

난 건강한 사람들이 배치받는 건설소대로 갔다. 여름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6시30분까지 식전 작업을 하고 깜깜할 때까지 작업을 한다. 중간에 식사시간 1시간씩밖에 없다. 블록을 만들 때는 1시간밖에 안 재울 때도 있었다. 벌목, 싸리베기, 풀베기, 뽕잎따기 등 사계절 일거리는 널려 있다. 도끼로 나무를 하면 숲 속에서 적재장까지 10여 리를 끌고 와야 한다.

수용소는 먹을 것으로 경쟁을 시킨다. 나무 적재장에 강냉이 국수떡을 갖다 놓고 200여명을 경쟁시켜 10등 이내에 든 사람만 1㎏씩 더 준다. 워낙 배가 고프니 그걸 먹기 위해 죽기살기로 일한다. 야생 뽕잎을 따 한꺼번에 85㎏을 지고 내려온 적도 있다. 풀베기의 경우 하루 800㎏이 목표인데 400㎏만 베어오면 배급량을 절반으로 줄인다.

처음 오면 6개월 정도는 절대 하루 작업량을 채울 수 없다. 배급을 줄이면 기운이 없고, 기운이 없으면 배급이 더 주는 악순환이다. 그 생활을 6개월 견디면 살아남는 것이고 못 견디면 굶어 죽는다. 내가 있는 3년 사이 우리구역 240명 중 절반 정도가 죽었다. 허기가 져 일을 못해도 맞들이(들것)에 들고 나가 땡볕이나 추운 작업장에 앉혀 놓아야 한다. 쥐·뱀·개구리·벌레 등 안 먹어본 것이 없다. 들것에 실려가는 심약한 사람도 뱀을 보면 3m는 날아간다고 한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다.

내가 6개월쯤 된 2000년 12월 너무 힘들었고, 살아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끼로 나무를 하다가 그냥 내 다리를 찍어 버렸다. 죽고 싶었다. 종아리뼈가 부러지지는 않았다. 그 덕에 이틀을 쉬었다.

◆탈출하다 잡히면 공개 처형

내가 있을 때 공개처형이 2건 있었다. 최광호는 2000년 8월 풀베기 작업을 나갔다가 가래나무 아래서 깜박 잠이 들어 대열에서 이탈했다. 들어오면 매 맞을까 두려워 숨어 지내다 3일 만에 경비대에 붙잡혔다. 잡힌 지 10일 만에 공개 총살당했다. 김호석은 2003년 2월 28일 싸리 베러 가서 감자를 훔쳐먹으러 갔다가 도망쳤다. 보위부가 개를 풀어 수색에 나섰는데, 이때 김호석의 얼굴이 개에게 물어뜯겼다. 그가 잡혀오자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봐라. 도주자는 이렇다. 우리는 해외까지 나가서 잡아온다”고 말했다. 5일 만에 처형됐다. 3명의 군인이 6발씩 쏘았다.

◆다시 죽을 각오로 탈출

2003년 7월 어찌된 일인지 출소 명령이 떨어졌다. “당의 배려로 용서해준다. 재범할 경우 사형”이라고 했다. 당시 북한에서는 한국 TV드라마와 영화가 크게 유행했었다. 중국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비디오 장사를 했다. 올인, 장군의 아들, 가을동화, 야인시대, 사랑이 뭐길래 등을 팔아 돈을 엄청 벌었다. 탈북 목적이 아닌 장사를 위해 중국 변방을 드나들기도 했다. 물론 보위부 군인에게 뇌물도 많이 줬다.

그런데 뇌물을 바치지 않은 군인에게 걸려 위기를 맞았다. 이젠 정말 죽는 길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내 생을 마감한다는 심정으로 북한을 탈출했다. 다행히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행에 성공했다. 26살의 나이에 이제 나를 위해 먹을 것을 장만하는 첫해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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