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폴러첸의 마른 얼굴

조선일보
입력 2006.07.26 18:49 | 수정 2006.07.27 07:00

이미일 6.25전쟁남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지난 21일 독일인 의사 노베르트 폴러첸씨가 열흘째 단식투쟁을 하고 있던 외교통상부 앞을 찾아보았다. 이런저런 일로 분주한 필자로서도 이 서양인의 장기 단식이 몹시 걱정스러워 한번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자신의 목에 건 빼빼 마른 북한 어린이의 사진을 가리켰다. 그의 얼굴도 불그스름하게 타 있었고 이미 충분히 말라 있었다.

2001년 폴러첸씨는 북한에서 응급의사로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추방된 후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한국으로 왔다고 알고 있다. 이후 그는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북한의 인권 상황을 알려왔다. 때로 기이하고 돌출적인 행동까지 해가며 언론과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필자 역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있을 무렵, 6·25전쟁 때 납북된 아버지의 생사를 찾아 가족모임을 만든 이후, 수십년 동안 침묵해온 남·북한 정부와 우리 국민들을 상대로 이 문제를 일깨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고 있다.

판문점에서 분계선을 넘는 시늉을 하는 등 폴러첸씨는 여러 행동으로 ‘트러블 메이커’를 자처해 왔음을 알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극히 열악한 상황에서 목표를 관철시켜야 하는 NGO 활동가로서 그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편이다. 지금 국내외에서 점점 뜨거워지는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한 우려와 관심 뒤에는 그의 헌신적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그에 대해 인색한 사람들도 인정하는 편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그의 전위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심각한 인권 상황을 알리려는 그의 의지는 매우 진지하고 일관되었던 사실에 대해 많은 사람이 보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폴러첸씨는 단식 2주일 만인 25일 저녁, 결국 병원으로 실려갔다고 한다. 단식 때 그는 마치 순교라도 하려는 듯한 태세였다. 이 독일인 의사가 목숨까지 걸고 무언가를 주장하는데 그걸 그저 연기라고 말한다면 잔인한 판단일 것이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한 달에 50만 달러를 벌기도 했다는 잘 나가던 의사였던 그가 지금 의사로서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북한의 보통사람들에 대해 그는 그의 방식대로 진료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일 신문과 방송은 북한의 미사일과 핵에 대해서만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지만, 그곳에 내 가족이 살고 내가 아는 친구가 산다고 생각해 보면 좀 다른 것도 보일 것이다. 폴러첸씨의 머릿속에는 마취제가 없어 소주를 마시고 수술을 받은 어린 소녀의 영상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다. 우리가 북한 사람들에 대한 순정과도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그를 높이 사주지 않는다면, 이제 먹고사는 문제 말고도 뭔가 정신적으로도 고양된 사회를 원하는 우리가 진짜 선진국을 꿈꿀 자격이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번 단식은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북한 인권에 대해 의미 있는 견해를 내놓기를 원한다는 간단한 목표를 놓고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조용한 외교’라는 이상한 독트린 때문에 우리는 유엔총회에서도 유엔인권위원회에서도 북한 인권 얘기만 나오면 숨을 죽이는 것인지 모른다. 북한이 미사일을 쏴도 핵을 개발해도 우리는 조용히 있어야 할 터인데, 그 사이 우리의 운명은 역사를 주도적으로 자신감 있게 이끌어가는 또 누군가가 결정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엔 사무총장 경선에 나선 반기문 장관이 세계의 친구로서 건강한 선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외교 수장이라면 이제 이 독일인이 다시 단식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반 장관과 우리 정부가 폴러첸씨에게 마음을 좀 열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미일·6.25전쟁남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