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의 영화기행 -15] ‘비포 선셋’의 프랑스 파리

조선일보
입력 2006.07.11 23:43 | 수정 2006.07.11 23:45

사랑의 수명을 결정하는 것은
입으로 내뱉은 낭만이 아니라 심장으로 삼킨 연민

안타까웠던 9년 전을 떠올리며 셀린은“다파리 튈르리 정원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퐁네프 다리에서 사크레 쾨르 대성당 앞 잔디밭까지 파리는 온통 연인들의 도시였다. /파리=프랑스 이동진기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기차 여행 도중 만나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단 하루 거닐며 사랑을 한다. 동이 터올 무렵, 둘은 전화번호도 주고받지 않은 채 6개월 뒤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이별한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본 관객은 누구나 궁금해했다. 그 남자 제시와 그 여자 셀린은 과연 6개월 뒤 재회했을까.

‘비포 선라이즈’의 9년 후 상황을 그린 속편 ‘비포 선셋’ 궤적을 밟아 프랑스 파리를 돌아다니는 여정은 세월의 위력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비포 선셋’은 그날의 일을 소설로 쓴 제시가 ‘저자와의 대화’ 행사에 찾아온 셀린과 만나며 시작한다. 재회가 이뤄진 파리 5구에 있는 헌책방 명소 ‘셰익스피어 서점’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치쌓인 책더미 사이 좁은 통로를 지나 낡은 나무 계단을 타고 2층으로 갔다. 제시가 셀린을 만났던 작은 방에선 아마추어 시인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토요일의 그 모임은 누구든 자신의 시를 복사해오면 돌려 읽고 평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방에서 나와 비좁은 서가를 구경하다 구석에서 허름한 침대를 봤다. 그 옆 작은 책상엔 낡은 타자기가 놓여 있었다. 책더미 사이엔 싱크대도 있었다. 예전부터 가난한 작가들을 재워주었다는 이 서점 2층은 책이 삶 자체인 풍경을 담고 있었다. 제시도 행사 전날 이곳에서 잤다. 2층에서 내려오려다 입구의 글귀를 본 순간 한없이 따뜻해졌다. “나그네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 것. 그들은 변장한 천사일 수도 있다.”

흘러간 9년 세월을 인식하고 어색하게 인사한 제시와 셀린이 서점을 나와 함께 걷던 작은 길 ‘뤼 생 줄리앙 르 포브르’로 접어들었다. 벽돌이 촘촘히 박혀 차도를 만들고 양 옆으론 소담스런 식당과 아담한 호텔이 들어선 파리의 전형적 뒷골목이다.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은 뒷골목을 누비는 마라톤 코스를 만들었다. 선수들이 미로 같은 코스를 달리다 길 잃고 헤맬 때 빵집 배달부 출신인 파리의 마라토너가 우승했다. 골목길을 달리는 마라톤 코스라니! 파리 뒷골목의 매력을 즐기는 사람들은 그 황당했던 마라톤을 낭만적 해프닝으로 기억한다. 대화를 시작한 둘은 서로 팔을 슬쩍 잡아가며 묵은 그리움과 솟는 반가움을 드러낸다. 그러곤 그때 그 ‘6개월 뒤’ 약속 장소에 간 제시가 할머니 장례식 때문에 오지 못한 셀린을 기다리다 발길을 돌렸음을 알게 된다. 어떤 엇갈림은 뜨거운 만남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음을 확인하면서.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셰익스피어 서점.
골목길을 누비다 둘이 찾아가는 ‘르 퓌르 카페’는 요즘 파리에서 새로운 예술 중심지로 부상한다는 11구의 샤론 역 근처에 있었다. 셀린과 제시가 앉았던 테이블로 가서 그들처럼 커피를 주문했다. 바(Bar)에 앉아 와인을 마시던 남자는 부드러운 샹송이 흘러나오자 휘파람을 불었다. 제시는 여기 앉자마자 “왜 미국엔 이런 카페가 없을까”라고 했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카페와 뒷골목은 파리지앵의 파리가 어떤 것인지 말해줬다. 탁자 위 냅킨에 적힌 ‘르 퓌르 카페’ 글씨 뒤엔 말줄임표 점 세개가 찍혀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철학과 종교와 사회에 대해 폭넓게 대화하던 둘이 끝내 줄여버린 말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랑의 수명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입 밖으로 내뱉은 낭만이 아니라 심장으로 삼킨 연민이다.

카페에서 나온 둘이 대화를 이어간 리옹 역 근처 산책로 ‘프로므나드 플랑테’로 갔다. 예전 기찻길을 공원으로 바꾼 산책로를 걷다 보니 서로 새끼손가락만 걸고서 거니는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연인들이란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드는 세월 앞에서 무모하게도 감정을 약속하는 사람들이다. 안타까웠던 9년 전을 떠올리며 셀린은 “다시 만났으니 추억을 바꿀 수 있어”라고 말하고, 제시는 “살아 있는 한 추억은 계속 바뀌지”라고 답한다. 시간 앞에서 좌초한 감정을 목도한 어떤 연인들은 추억의 내용을 바꾸면서까지 감정을 살려낸다. 제시와 셀린이 탔던 센강의 유람선에 올랐다. 좁고 잔잔한 센강을 떠다니며 익숙한 건축물들을 바라보는 것도 파리를 경험하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지는 태양은 그림자 길이를 두 배로 늘린다. 제목처럼 ‘해가 지기 전에’ 공항으로 떠나야 할 제시는 짙은 아쉬움 때문에 이별을 자꾸 미룬다. 무려 네 번을 유예한 끝에 그는 결국 셀린 집으로 들어선다. 셀린이 자기 집 주소라고 말하는 ‘샤토도’ 지하철 역 근처 작은 길 ‘뤼 데 프티 제큐리’를 헤맸지만, 그 집을 찾아내지 못했다. 길 이름의 의미처럼 쳇바퀴 속 ‘작은 다람쥐’처럼 골목길을 오가며 닫힌 문 앞 인터폰으로 묻고 또 물었지만 허사였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허망하게도 극중 대사와 달리 실제 촬영지는 다른 곳이었다.
셀린과 제시가 찾았던 르 퓌르 카페
텅 빈 거리에 서서 둘의 재회에 서린 감정의 정체는 뭘까 생각했다. 9년이 흐르는 사이, 꿈꾸는 20대 중반에서 삶의 불능과 부정(否定)을 확인하게 된 30대 중반이 된 제시와 셀린. 삶의 외형을 만드는 것은 대로의 사건이지만 반복 음송되는 것은 뒷골목에서 발생한 일이다. 둘은 작가와 환경운동가로 활동하는 현재 삶의 외형 대신 오래 전 비엔나 뒤안길의 하루를 생(生)의 내밀한 동력으로 여긴다. 회상되는 것은 세월이 아니다. 우리가 문득문득 떠올리는 것은 언제나 순간이다. 순간은 도도한 세월 앞에 늘 무릎을 꿇지만 결정적 지점에 되살아나 그 모든 시간을 무화시킨다. 지루한 영원은 폭발하는 찰나를 동경한다.

집에 들어온 제시에게 셀린은 자신이 만든 노래를 들려준다. 9년 전 일을 아프게 반추하는 노래였다. 그러고선 재즈 싱어 니나 시몬을 흉내내며 마지막 장면에서 장난스레 묻는다. “자기, 이러다 비행기 놓쳐.” 제시는 여유롭게 답한다. “알아.” 이제 질문은 형태를 바꿔 반복된다. 결국 제시는 그녀 집에 남았을까. 아니면, 아쉬운 이별을 다시 빚은 채 현실 대신 추억을 선택할까.

니나 시몬의 시디를 넣고 헤드폰을 꽂았다. 편안하면서 슬프고, 묵직하면서 살짝 떨리는 그녀의 노래 ‘당신이 안다면’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알았더라면, 당신이 믿었더라면, 당신이 있었더라면. 숲을 이루지 못한 꽃은 안타깝고, 숲을 이룬 꽃은 시든다. 사랑에 대한 모든 가정법 문장은 줄이고 삼킨 말들이었다. 그러나 제시와 셀린의 사랑은 ‘해가 지기 전에’ 끝내 이야기와 노래로 남았다.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그 이야기와 노래까지 잊힌다 해도, 지금 이 순간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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