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이야기] ‘광주 1945’(上)

조선일보
입력 2006.06.19 23:58 | 수정 2006.06.19 23:58

8월 15일 광주시내 감격의 물결 청년단, 전남건준 등 속속 조직

광복의 기쁨에 젖어 중심가로 쏟아져 나온 광주시민들. 사진=‘광주시사’
최근 해방정국을 주된 소재로 한 드라마 ‘서울 1945’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른 바 역사에 대한 해석의 편향성 여부가 바로 그것이다. 아무튼 이 드라마를 보면서 ‘광주 1945’는 어떠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과 중앙의 역사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에 걸쳐 1945년 광주 상황으로 돌아가보기로 한다.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당시 전남도청 회의실. 일본인 전남지사 야기 마사루와 도청직원들은 이곳에서 일본천황 히로히또의 목소리를 방송으로 들었다. “나의 선량하고 충실한 신민들이여!”로 시작, 무조건 항복을 알리고 있었다. 회의실 밖 옥외방송을 듣고 있었던 시민들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금남로로 진출했다. 광주중심가는 감격한 시민들로 가득했다.

이어 오후 1시 도청회의실. 도청직원 300여명이 모였다. 전남도청 조선인청년단을 결성했다. 도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다시 오후 5시 광주서중 강당. 졸업생 100여명이 화랑단을 만들었다. 화랑단은 곧바로 충장로로 나아갔다. 그리곤 광주공원으로 달려가 신사(神社)를 때려 부셨다.

감격과 흥분의 하루가 지났다. 이튿날인 16일 전남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국기열(동아일보기자 출신), 최인식(조선일보기자 출신) 등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광주YMCA 설립자인 최흥종 목사를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증심사에서 은거하고 있던 최목사를 찾아갔다.

다시 다음날인 17일 오전 11시 광주극장. 이곳에서 전남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혼란한 치안을 유지하고 하루 속히 국가를 세우자”고 결의했다. 건준 간부들은 곧바로 일본인 전남지사를 찾아갔다. “행정권을 인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중안건준의 신임장을 받아오면 행정권을 넘기겠다”고 맞섰다. 이때 건준사무실은 고광표(전남건준 재무부장)가 운영하던 광주 동구 대인동 창평상회였다. 이곳에서 모인 건준간부들은 임시 대표단을 구성, 신임장을 받기 위해 이날 밤 8시쯤 트럭을 타고 급히 서울로 향했다.

이 트럭이 서울로 갈 것이란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김성삼(본명 박헌영)이 찾아와 동승했다. 당시 박헌영은 일제의 검거망을 피하기 위해 공산조직인 ‘경성콤그룹’ 조직책의 도움으로 광주 백운동 벽돌공장에서 신분을 완전히 숨긴 채 3년 동안 은신해왔었다.

건준간부들이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도 혼란했다. 서울서도 행정권인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다시 광주로 내려왔다.

전남건준은 23일 창평상회에서 회의를 열었다. 서울 사정을 전해 듣고 행정권 인수를 당분간 보류했다. 이어 25일 광주서중에서 수만명이 모인 가운데 ‘광주시민해방축하대회’를 열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