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두차례나 시작한 몬탁해변엔 개와 새 발자국 나란히

조선일보
입력 2006.05.09 23:41 | 수정 2006.05.09 23:42

이동진의 세계영화기행

몬탁의 명물인 등대‘몬탁 포인트라이트하우스’앞 벤치에서 연인들은 끝없이 속삭였다. /몬탁(미국)=이동진기자
“사랑은 자동차처럼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되는 것은 그저 핸들과 승객, 그리고 도로 사정뿐이다.”(프란츠 카프카)

◆ 핸들

좁은 모퉁이를 돌 때마다 뻑뻑한 핸들 탓을 했다. ‘밸런타인 레인 123 번지’가 나올 때까지 급격하게 휘며 이어지는 도로를 뱅뱅 돌면서 한참 헤맸다. 뉴욕시 북쪽 20여㎞의 욘커스 시.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 조엘이 살았던 아파트를 마침내 찾고보니 흑인 거주지역 한 가운데에 있었다. ‘에덴데일’이란 이름의 7층 아파트 내부를 둘러보려 건물 안으로 들어설 때, 울긋불긋 차려입은 할머니가 문을 잡아주며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적은 제작비로 찍은 이 영화의 뉴욕시 인근 촬영지들은 저소득층 거주지인 경우가 많았다.

언덕길 아래로 걷다 사거리에 ‘드럭 프리 존(Drug Free Zone)’이란 알림판을 발견했다. 마약 범죄를 없애기 위해 우범 지대 곳곳에 세워놓고 가중처벌하는 지역임을 알리는 그 글귀는 역설적으로 그곳이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곳임을 공언하는 낙인 같았다.

차를 처음 몰면 핸들을 거머쥐고 질주하고픈 욕망을 느낀다. 그러나 오래 운전하면 그만 핸들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불현듯 찾아온다. ‘이터널 선샤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기쁨보다 권태가 더 커져 이별을 맞게 된 연인들 이야기였다. 그런 영화의 주인공이 사는 거리명이 ‘밸런타인 길’이라니. 마약으로 신음하는 마을 한 가운데 아파트명이 ‘에덴 골짜기’라니. 황량한 세상은 작명을 통해서 간신히 꿈꾼다.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서 입술에 희망이 붙을 때까지. 흙길을 지나온 두 발은 먼지로 뒤범벅되더라도.
봄이 오는 길목에 놓인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
◆ 승객

평일 낮 몬탁행 기차엔 승객이 거의 없었다. 뉴욕 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섬 ‘롱 아일랜드’ 끝의 몬탁으로 가기 위해선 맨해튼에서 3시간여 기차를 타야 한다. 오후 2시20분, 종착역인 몬탁에 도착했을 때 내린 승객은 일곱이었다. 조금 긴 듯한 여정 끝, 승객들은 저마다 자리에 쓰레기들을 남겨놓고 사라졌다.

한국의 정동진 같은 곳이랄까. 뉴요커들이 일출을 보러 찾곤 하는 동쪽 끝 마을 몬탁은 작은 플랫폼 하나를 통해 세상 끝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었다. 호감을 느끼고도 내성적 성격 탓에 속으로 삭인 조엘에게 클레멘타인은 이 플랫폼에서 장난치며 인사하는 것으로 성큼 다가선다.

녹슨 철로는 문을 닫아 건 역사(驛舍) 옆에서 끊겨 있었다. 연인들이 그리는 궤적은 두 줄 철길 같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보며 오래오래 함께 갈 수 있는. 그러나 합쳐져 완전히 같은 길을 이룰 순 없는. 그러다 종종 막다른 지점을 만나기도 하는.

겨울에 이 영화를 찍은 몬탁의 쓸쓸한 해변은 두 사람 사랑이 두차례나 시작된 곳이었다. 거기서 처음 만난 둘은 곧 연인이 된다. 시간이 흘러 지겨워진 그들은 첨단기술의 도움으로 추억을 삭제한 뒤에도 밸런타인 데이가 되자 어렴풋이 몸이 이끄는대로 다시 몬탁에 가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똑같은 사랑을 재차 시작한다. 뇌는 기억 못해도 심장은 기억한다. 먼저 기억하는 것은 정신이지만, 끝까지 기억하는 것은 몸이다.

봄날의 늦은 오후, 몬탁 해변을 걸었다. 파도가 대지를 탐한 흔적이 가늘고 고운 모래 위 여러겹 부챗살 무늬로 남아 있었다. 그곳엔 개와 새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함께 바닷가를 거닐었을 리 없지만, 각자가 같은 곳에 남기고 간 자취는 공존의 안온함을 전했다. 시간을 두고 보면 모든 삶은 존재의 그늘을 서로에게 드리우며 겹친다.

해변에 늘어선 숙박 시설은 제 철을 기다리며 모두 문을 닫아 걸었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쌀쌀한 듯 더없이 상큼했다. 여름을 기다리는 문명이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 바다는 부지런히 봄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 도로 사정
맨해튼의 도로 사정은 언제나 최악이었다. 클레멘타인이 일하는 곳으로 나왔던 컬럼비아 대학 구내 서점 앞에 겨우 도착했지만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한참 헤맸다.

지하에 있는 그 서점에서 책 두 권을 고른 후 계산 줄에 서 있다가 앞에 있던 여학생이 ‘다윈 상’이란 책을 들고 있는 것을 봤다. 그 책은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질러 죽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인류의 진화에 기여한 사람들 실화를 모은 책이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오래된 연인들은, 작은 일로 다툴 때조차 가장 잔인한 말로 찌르는 실수를 저지른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헤프다고 비난하고 클레멘타인은 조엘이 따분하다고 조롱한다. 깊숙한 자상(刺傷)을 입은 모습을 목도하고야 후회하지만 오랜 관계는 종종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종말을 맞는다.

비 내리는 센트럴 파크에 들어서자 마침 시민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최종 도착 지점을 찾아갔더니 전광판 시계가 출발 후 4시간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레이스를 마치는 사람들이 최후의 질주를 하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번호를 확인해 이름을 불러가며 하나씩 구경꾼들에게 소개할 때마다 주자들은 마지막 힘을 내어 손을 흔들고 미소를 머금었다. 다섯 시간 가까이 고통스럽게 달렸을 그들이지만, 종착점에서 연이어 목격했던 것은 최후로 길어올린 위엄과 여유였다.

재회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각자 상대에 대한 기억을 지운 사실을 확인하고도, 그토록 상대에게 넌더리 낸 이유를 알아채고도, 라스트신에서 그 사랑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 모든 권태와 위험의 불구덩이를 뻔히 보고도 재차 뛰어드는 이 바보짓은 무엇 때문일까.

자동차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조종할 핸들과 타고 갈 승객과 달릴 도로가 없다면 설사 문제가 없다 한들 그 차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부조리로 가득한 세계에서 결함투성이인 삶이 누릴 수 있는 게 실수투성이 사랑이라면, 그 보잘 것 없는 사랑을 다시 반복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출발 후 5시간을 넘겼을 때 서로 팔짱을 낀 중년 여인 셋이 골인지점으로 달려왔다. 세 사람 이름을 아나운서가 외치자 그들은 자랑스러움과 흥겨움을 가득 담은 눈웃음으로 인사했다. 실수투성이 사랑에 그저 하나를 더 바란다면, 길고 긴 그 사랑의 종착점이 어디든, 마지막 순간에 미소로 답례할 수 있기를. 기쁨이었든 고통이었든, 함께 뛸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고마웠음을 눈웃음으로 확인해줄 수 있기를. 시간을 견뎌낸 모든 것들은 갈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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