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그는 천생 기자였다"

  • 오태진
    입력 2006.02.25 19:42 | 수정 2006.02.26 10:48

    사신(死神) 앞에서도 끝내 붓 꺾기가 싫었던…

    고 이규태 고문
    3년 차 신참 기자 이규태가 1961년 소록도 한센병 환자촌을 취재했다. 외지인을 꺼리는 환자들에게 붙잡혀 닦달을 당하고도 이규태는 바다를 메워 ‘천국’을 만들겠다는 그들의 ‘눈물’을 기사에 담아냈다. 작가 이청준이 이 기사를 바탕으로 쓴 것이 ‘당신들의 천국’이다. 작품 속 기자 ‘이정태’의 모델도 이규태다. 훗날 이청준은 말했다. “이 소설의 3분의 1은 이규태의 것이다. 그는 내 소설 속의 주인공이었지만 이제 나는 그의 독자다.”

    사실 이 땅에서 이규태의 독자보다 독자 아닌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8년 몸을 의탁하던 백담사 궁벽한 객사(客舍) 방을 TV가 비춘 적이 있다. 생활 편의품 하나 없이 썰렁한 방에 책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놓여 있었다. 물러난 권력자가 심란하고 황망하게 서울집을 뜨면서도 챙겨온 것이 이규태의 저서였다.

    이규태는 기자가 노력하면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기자였다. 조선일보에서 45년을 근속했고 퇴직한 뒤로도 2년을 더 독자와 함께 했다. 그가 연재한 대형 시리즈만 37개를 헤아린다. 1968년 60회를 이어간 첫 연재 ‘개화백경(開化百景)’부터가 한국 신문 사상 가장 긴 전면(全面) 시리즈다. 해외 63개 대학 연구소에서 한국학 자료로 쓰인 기록도 갖고 있다.

    1975년부터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연재되면서 그의 우리 것 찾기는 일대 현상을 불렀다. 대학에선 토론대상, 기업에선 연수교재, 군에선 교육자료가 됐다. 8권으로 묶어낸 책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초(超)장기 베스트셀러가 됐고 지금도 꾸준히 팔린다. 그는 모두 120권에 이르는 저서를 낼만큼 왕성한 저술가이기도 했다. 1983년 출발해 23년을 달려온 ‘이규태 코너’는 새삼 말 할 것도 없다.

    이규태는 한국인들에게 한국인이 누구인가를 깨우쳐준 기자였다. 그 평생 작업에 눈 뜬 계기가 작가 펄 벅과의 만남이었다. 1960년 한국에 온 펄 벅은 농부가 볏단 실은 소달구지를 끌면서 자기도 지게에 볏단을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농부도 지게도 다 달구지에 오르면 될 텐데 소의 짐을 덜어주려는 저 마음이 내가 한국에서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규태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풍경에 펄 벅이 감동하는 것을 보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실마리를 잡았다. 왜 우리 음식엔 물이 많은지, 왜 뜨거워야 하는지, 갓은 왜 비도 새고 바람도 새는지, 그걸 뭣하러 썼는지, 우리는 사촌이 땅 사면 왜 가슴이 아니고 배가 아픈지. 의문이 끝없이 일었다. 우리 것의 원형을 찾는 대장정(大長程)이 시작됐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었다.

    이규태는 널리 보고 오래 기억하는 마지막 박람강기형(博覽强記型) 기자였다. 다들 인터넷에 널려 있는 남의 것 골라다 쓰는 세상에도 스스로의 눈과 귀로 지식의 곳간을 채워갔다. 책 1만5000권이 메운 집 지하실은 ‘한국학 벙커’였다.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하는 필법의 원천이었다. 책마다 페이지가 접혀 있거나 밑줄을 긋고 메모한 흔적이 서재 주인과 책들의 수십년 대화를 말했다. 그나마 멀쩡한 책들이 그렇고, 훨씬 더 많은 책들이 분해되고 오려져 파일에 담겼다.

    그는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나름대로 창안한 분류법으로 방대한 자료를 정리했다. 그 ‘재야(在野) 도서관학’으로 만든 색인이 10만개를 넘는다. 그는 마지막 병상에 누울 때까지도 한 달에 200만~300만원어치씩 책을 사들였다. 인터넷은 들여다 보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것, 백과사전 이상의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 했으면 ‘꽤나 건방지다’는 말을 들었을 얘기다.

    이규태는 자기 이름이 ‘한국학’ 앞에 붙어 불렸던 기자였다. 그는 근래 부쩍 “저 비싼 책, 희귀한 자료들을 누군가 활용하면 좋을텐데” 하고 되뇌곤 했다. “대학처럼 함께 공부하는 선후배들이 있었다면 참 할 일이 많은 분야인데 혼자 힘으로는 한계를 절감한다”고도 했다. 그는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인 일본 민속학자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男) 이야기도 자주 했다. 야나기다가 채집한 방대한 자료를 후세가 정리해 체계를 세우는 ‘야나기다학(學)’이 생겼듯 ‘이규태학’도 곧 나올 것이다.

    이규태는 겉은 질박하고 속은 따스한 기자였다. 전북 장수의 외진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종이를 처음 보고 너무 신기해서 그걸 접어놓고 자다가도 펴보곤 했다”고 말했다. 어렵게 자란 만큼 그는 평생 검약하게 살았다. 집 변기 물통에 벽돌을 넣어 물을 아꼈고 점심은 몇 천원짜리만 먹었다. 그러나 뜻맞는 후배들과는 곧잘 낙지집, 선술집에서 소주 자리를 벌였다. 맨날 그 양복이 그 양복이었어도 후배 전세 값은 선뜻 빌려주곤 했다.

    그는 이발소에 가지 않고, 주례 서지 않고, TV에 나가지 않는다는 ‘삼불(三不)’을 지켰다. 이유는 “내 얼굴에 그게 되겠어?”였다. “TV에 딱 한 번 나갔는데 둔하고 말주변 없어서 안 맞더라”고 했다. 고정 칼럼을 수십 년 거르지 않고 쓸 수 있었던 근력은 50년 가까운 테니스와 등산으로 쌓았다. 그러나 그 피 말리는 정신적 행군은 진중한 참을성, 굼뜬 듯한 무던함, 질박한 성품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규태는 자기를 알아보고 배려해준 윗사람에게 글로 보답한 기자였다. ‘이규태 한국학’의 출발점 ‘개화백경’과 세계 언론사에 남을 ‘이규태 코너’ 연재를 그에게 권한 이가 당시 사장이던 방우영 명예회장이었다. 방 명예회장은 ‘이규태 코너’라는 칼럼명도 지어줬고, 일본에 가면 으레 헌책방에 들러 이규태가 반길 유익한 책을 두어 권씩 사다주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방상훈 사장도 그의 글을 하늘이 끝낼 때까지 쓸 수 있게 배려했다. 그는 가끔씩 소주 자리에서 글 쓰는 사람을 이해해주는 두 경영자에 고마워했다.

    이규태는 시종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은 기자였다. 그는 후배들 기사에 정(情)이 있는가, 인간적인 데에 주목했는가로 기사 품질과 기자 자질을 평가했다. 그렇게 써야 신문이 따뜻해진다고 했다. 관리자로서 그는 문화·조사·사회부장 합쳐 5년에 주필도 잠시였다. 사실상 무관(無冠)의 기자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감투보다 영광스러운, ‘기자’라는 감투를 썼다.

    그는 병상에서 이미 열흘 전에 ‘이규태 코너’를 접는 고별 원고를 기자 아들에게 구술해 놓고도 매번 “이제 신문에 실으라고 할까요”라는 아들의 여쭘엔 답을 하지 않았다. 사신(死神)을 앞에 두고도 끝내 붓을 꺾기가 싫었던 것이다. 이규태, 그는 천생 기자였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tjo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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