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계 190세 '추억의 情談'

조선일보
입력 2006.02.22 19:06 | 수정 2006.02.22 19:09

수필가 피천득·정진숙 출판원로
출판인모임‘은석회’서 만나
"춘원은 너무 착했어… 일본 거짓 선전 믿어 한 일본인이 춘원을 양아들 삼으려고 회유"
"우리말사전 출간은 기적 같은 일이지… 잘 팔리는 책보다 읽어야 할 책 출판 "

피천득·수필가
“나를 문학의 길로 이끈 이광수 선생은 재주가 많고 착하셨지만, 바보같은 분이기도 했어요.”(피천득)

“해방 후 이희승, 이극노 선생 등이 찾아와 ‘우리말 큰 사전’ 원고를 내 앞에 내던지며 ‘이걸 일본 출판사에서 펴내야 하느냐’고 큰소리치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정진숙)

문단과 출판계의 현역 최고령인 수필가 피천득(96)씨와 을유문화사 정진숙(94) 대표가 햇볕 따뜻한 22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며 피씨는 주로 춘원의 친일에 대한 소회를 밝혔고, 정 대표는 ‘우리 말 큰 사전’을 만들 때 겪었던 고통과 보람을 회상했다. 피씨는 ‘인연’ 등 주옥같은 산문으로 사랑받는 대 수필가. 정 대표는 해방되던 해 출판을 시작해 지금까지 7000종이 넘는 책을 펴낸 대한민국 출판 역사의 산 증인이다.

윤형두(71) 범우사 대표, 전병석(69) 문예출판사 대표, 김경희(68) 지식산업사 대표, 고정일(66) 동서문화사 대표, 김시연(47) 일조각 대표 등 우리나라 출판계를 대표하는 출판사 사장들도 이날 회동에 참석해 두 원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진숙·출판원로
“일본은 전함이 침몰 당해 패전이 짙을 때에도 ‘대본영 발표’라는 걸 통해 승승장구한다고 거짓선전을 했어요. 그런데 춘원은 사람이 착해서 그걸 믿었나 봐요.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워요.” 김경희 대표가 “일제의 언론인인 도쿠도미(德富蘇峯)가 춘원에게 ‘내 아들이 되어 달라’ 하는 등 회유가 집요했다”고 부연했다. 이기웅 대표도 “지식인들이 견디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고 말을 받았다.

그러자 피씨가 반박했다. “난 그게 싫어 금강산에 들어갔어요. 금강산 상월스님에게 불경 배우며 한평생 살 각오를 했지요.” 피씨의 수필집을 출판한 범우사 윤 대표가 거들었다. “3·1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을 때 선생님께서 ‘친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도 하지 않았다’며 수상을 거절하셨던 일이 기억납니다.” 정 대표는 ‘우리 말 큰사전’ 출판은 기적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조선어학회 사건때 경찰에 압수됐던 원고를 광복 직후 서울역 주변 운송회사 창고에서 발견했어요. 신문을 마분지 같은 데 찍어내던 시절이라 종이도 없고 활자도 없어 고충이 심했어요.”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는 등 10년 넘는 작업 끝에 ‘우리 말 큰사전’(전 6권)이 나왔다. 김경희 대표는 “1965년 진단학회와 함께 만든 한국사도 을유의 큰 업적”이라고 덧붙였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과 정진숙 을유문화사 대표 등 출판인들이 인사동의 한 음식집에서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다. 왼쪽부터 전병석, 정진숙, 이기웅, 피천득, 고정일, 윤형두, 김시연씨. /유성훈 인턴기자(중앙대 사진학과 2년)
전병석 대표는 “우리는 ‘잘 팔릴 책이냐’가 아니라 ‘읽어야 할 책이냐’로 출판 여부를 결정해왔다”고 자부하자 김시연 대표는 “요즘 청소년들은 책에 대한 기호가 달라져 코드 맞추기가 어렵다”고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날 회동은 지난해 을유문화사 창립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판인들이 만든 ‘은석회’가 피씨를 초청해 이루어졌다. 은석(隱石)은 정 회장의 아호. 식사를 마치고 일어설 때 이기웅 열화당 대표가 선물을 준비했다. 김용택 시에 그림을 곁들인 시화집 ‘맑은날’. 평생 글에 묻혀 살아온 두 사람은 “그림이 많으니 글 읽기가 어렵지 않으실 것”이란 이 대표의 농담에 소년처럼 티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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