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사랑]孝宗과 金堉의 入閣 승강이

조선일보
입력 2006.01.05 18:40 | 수정 2006.01.05 18:40

효종이 즉위년(1649)에 우의정에 제수한 잠곡(潛谷) 김육(金堉)은 세 번이나 사양 상소를 올렸다. 효종도 이에 질세라 거듭 ‘불윤(不允)’하며 출사를 요청했다. 조선판 삼고초려(三顧草廬)였다. 그러자 김육은 “왕자(王者)의 정사(政事)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우선할 일이 없으니 백성이 편안한 연후에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라며 양호(兩湖:충청·전라)지역의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출사(出仕) 조건으로 내걸었다. “신에게 나와서 회의하게 하더라도 말할 바는 이(대동법)에 불과하니, 말이 혹 쓰이게 되면 백성들의 다행이요, 만일 채택할 것이 없다면 다만 한 노망한 사람이 일을 잘못 헤아린 것이니, 그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습니까”(‘효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조)라는 상소에 조정 일각에서는 왕을 압박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김육이 ‘백성들의 다행’으로까지 평가한 대동법은 부자나 빈자나 같은 액수를 납부하던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하되 그 부과단위를 토지 소유의 다과(多寡)로 바꾸는 세법(稅法)이었다. 토지 소유자들의 세금 부담이 많아지기에 양반 지주들이 반대하자 효종은 충청 지역에 먼저 실시하는 것으로 절충했고 김육은 출사해 이를 주관했다. 그 주무관청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선혜청(宣惠廳)인 것이 법의 성격을 보여주는데, 그 의미는 비단 빈자(貧者)를 위한 세법에 국한되지 않았다. 대동법에 따라 등장한 공인(貢人)들은 수공업자들에게 자본을 대주고 물품을 제작시키는 선대제(先貸制)를 시행했는데, 이는 상업자본주의의 초기 형태로서 일제 식민사학이 전파한 한국사 정체성론(停滯性論)을 부정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대동법은 빈자를 위한 민생법안일 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 전체의 발전을 이끈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개혁법안이었던 것이다. 세 번씩이나 사양하는 사람을 삼고초려한 효종이나 무엇이 될 것인가보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김육. ‘코드’가 전면에 등장한 시끄러운 현 개각 정국에서 효종 같은 임금과 김육 같은 재상이 벌였던 350여 년 전의 흐뭇한 출사 승강이가 어찌 그립지 않겠는가.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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