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통역이 되나>이끌림에 무너진 30년차

  • 김명환기자

    입력 : 2004.02.08 16:59 | 수정 : 2004.02.08 16:59

    도교에서의 '7일간의 사랑'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나이 차이를 넘어 교감하는 밥(빌 머레이)과 샬롯(스칼렛 요한슨). 낯선 도시 도쿄에서 둘은 ‘사는 게 공허한 자’의 눈빛을 서로 발견한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의 커플은 기이한 조합처럼 보인다. 50대 초반의 한물간 남자배우 밥 해리스(빌 머레이)와 20대 초반의 기혼여성 샬롯(스칼렛 요한슨). 커플이라기보다는 부녀(父女)라면 딱 맞을 두 사람이 만난다. 하지만 이런 설정만 보고, 매력 있는 로맨스 그레이와 젊은 여자의 불륜 따위를 예상하지 마시라. 남자 주인공 밥에게 판에 박힌 남성미 같은 건 별로 없다. 샬롯은 매력 있는 외모를 가진 여성이지만 밥을 사로잡은 건 그녀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이다.

    남녀의 만남은 일본 도쿄에서 이뤄진다. 남자는 일본 위스키 광고 모델이 되기 위해 왔고, 여자는 사진작가인 남편의 작업 여정을 따라 왔다. 호텔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 마주친 남녀는 서로에게서 ‘사는 게 쓸쓸한 사람의 눈빛’을 찾아낸다. 결혼 25년째인 중년 사내는 언제부턴가 늘 아이만 챙기는 아내 때문에 자신의 삶이 겉돌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여자 역시 문학과 사진을 꿈꿨지만 지금은 얼굴 보기도 힘들 만큼 바쁜 사진가의 아내가 되어 삶이 공허할 뿐이다. 그런 남녀가 만나 서로의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던 외로움을 새로 발견한다. 자신들에겐 한없이 낯설고 황량할 뿐인, 동양의 거대 도시에서 보낸 그들의 7일은 짧지만 영원히 기억될 만남이 된다.

    남자가 말한다. “탈옥을 계획 중인데 공범이 되겠소?” 둘은 함께 술 마시고 노래하고, 호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야기도 나눈다.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이다. 조금씩 다가가지만 그 이상은 또 어쩌지 못하는 둘이, 붐비는 도쿄 거리에서 포옹하는 라스트가 길고 깊은 잔상을 남긴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맵싸하고 달콤하지만, 뜬금없이 행복한 멜로 영화들과는 금을 긋는다. 육체적 소통과 거리를 둔 이 별난 사랑의 모습 속엔 남녀 간 사랑의 본질이 ‘세상에서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는 이성에 대한 이끌림’임이 더 또렷이 드러난다. 인생의 허허로움까지 슬쩍 건드리는 이 영화의 속살을 느끼는 관객들에게 그 울림은 깊고도 강하다.

    ‘로저 무어’를 ‘롯자 무아’로 발음하는 일본식 영어를 못 알아들어 생기는 소통 부재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영화 내내 반복되면서 테마를 환기하고, 짭짤한 웃음도 선사한다. 황량한 중년의 내면 풍경을 담백한 화법으로 빚어낸 빌 머레이의 노련한 연기가 영화를 든든히 받친다.

    화려한 도시도 군중 속 고독을 느끼는 자에겐 어느 순간 한없이 쓸쓸한 사막으로 느껴지는 법. 파친코에 열광하는 남녀, 바쁘게 오가는 택시들, 왁자지껄한 행인들을 삶이 쓸쓸한 자의 시선으로 잡아낸 랜스 아코드의 카메라가 예리하다. 거장의 총명한 딸 소피아 코폴라는 어린 나이답지 않은 깊이의 작품을 재치있는 화법으로 만들어냈다. 삶을 좀 다르게 살고 싶은 모든 이에게 다가갈 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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