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전효숙(全孝淑·52) 서울 고법 부장판사가 최초의 여성 헌법재판관으로 내정되자 우리 사회에는 일대 파문이 일었다. 기수파괴도 한 원인이었지만 특히 보수적이기로 이름난 법조계에서 여성이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 법관들은 이에 대해 “시대가 시대니만큼 당연한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몇 년 전부터 여성 법관들 사이에서는 “왜 여자는 헌법재판관이나 대법관이 될 수 없냐”는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왔다고 한다. 이선희(여·李善姬·54) 사법연수원 교수는 전 판사의 헌법재판관 내정에 대해 “여태까지 헌법이나 법을 만들고 집행할 때 남성들이 주류였기 때문에 여성의 시각이나 의식 등을 추정할 수 밖에 없어 미흡한 점이 많았다”며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어 “10여년 전 최초로 여성 미국 연방 대법원 판사로 오코너(73)가 임명되었을 때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지만 지금은 옳은 선택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여성 법조인들이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라고 덧붙였다.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에 여성이 임명돼야 한다는 목소리는 올초 강금실(康錦實·46·사시 23회) 변호사가 첫 여성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더욱 높아졌다. 사법시험 합격자와 사법연수원 수료생, 신규임용되는 예비 판사들 중 여성 비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데도 사법부 고위직을 남성이 독점하고 있다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다는 비판도 일었다.
실제로 지난 해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 998명 중 여성 합격자는 239명으로 전체의 23.9%를 차지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수석합격자는 여성이었으며 최연소·최고령 합격자 역시 여성이었다.
올해 초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32기 수료생 789명 중 여성비율은 18.9%(151명)로 역대 최고치를 보였고 수석졸업도 여성이 차지했다.
신규임용되는 예비여성판사 비율 역시 1999년 8%, 2000년 16.6%, 2001년 22.4%, 2002년 31.5%로 꾸준히 증가하다가 올 초에는 49%(110명 중 54명)로 4년 새 급속히 증가했다.
연수원 수료생은 자신의 성적에 따라 판사, 검사, 변호사로 임용되는데 판사 지원자의 성적이 가장 높고 경쟁도 치열하다. 이처럼 여성 판사가 많이 배출되는 것은 검사나 변호사에 비해 차분하게 살피고 따지는 성품을 요구하는 판사직이 여성에게 더 맞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적이 우수해야만 근무기회가 주어지는 서울지법에 올해 배치된 예비판사는 34명, 그 중 24명이 여성이다.
22일 대법원에 따르면 전체 법관 1973명 가운데 여성 법관은 예비판사를 포함해 227명으로 전체의 11.5%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판사는 1952년 고시사법과에 합격해 54년 임용된 고(故) 황윤석(黃允石)씨. 1961년 황 판사가 사망한 후 여성단체에서 고인의 뜻을 기려 사법고시 준비생을 위한 윤석장학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현직 여성 판사중 법원의 수뇌부인 법원장 임명에 근접해있는 여성 판사는 고법 부장판사 4명(전체 고법부장판사 86명)이다.
최고참은 서울고법의 이영애(李玲愛·55·사시 13회) 부장판사다. 서울법대를 수석졸업하고 사법시험에도 수석합격한 이 판사는 1988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지법 부장판사에 오르고 1995년 역시 여성 최초로 고법 부장판사에 임명됐다.
지난해 말부터 이 판사가 최초의 여성 법원장이나 여성 대법관·헌법재판관이 될지도 모른다는 설이 조심스레 제기돼 왔으나 이번에 후배인 전효숙 서울 고법 부장 판사(사시 17회)가 먼저 헌재 재판관으로 지명됐다.
이영애·전효숙 판사와 함께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재직중인 전수안(田秀安·51) 판사는 사시 18회, 부산출신으로 서울법대 졸업 후 사법시험에 합격해 78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로 법관 생활을 시작했다.
사시 20회 출신인 대전고법의 김영란(金英蘭·47) 부장판사는 이번 대법관 제청 파동시 전효숙 헌법재판관 내정자와 함께 시민단체가 추천한 대법관 후보에 올랐다. 변호사인 강지원 전 청소년 보호위원장(54)이 남편이며, 김 판사의 동생도 서울지법 부장판사이다.
김 부장판사와 동기인 사법연수원의 이선희(李善姬·54) 교수 역시, 서울지법 부장판사 출신으로 여성법관들 중 선두그룹에 속한다. 1980년 서울가정법원에 첫 부임했을 당시 아내가 가출했다는 이유만으로 남편의 책임을 묻지 않은 채 남편의 이혼청구를 들어주던 판결관행에 의문을 제기, 법원으로 하여금 전체법관회의를 통해 이혼청구시 처가 쪽 사실확인을 첨부하도록 조치해 화제가 됐었다.
선두 그룹에 이어 사시 24회의 조경란(趙京蘭·43), 김선혜(金善惠·48) 판사가 각각 수원지방법원과 수원지법 성남지원의 부장판사로 근무중이며 사시 26회의 박보영(朴保泳·42)·이정미(李貞美·41) 판사와 27회의 김영혜(金榮惠·44) 판사가 각각 서울가정법원, 울산지방법원,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재직중이다.
이들외에 현직에 있는 여성 법관은 대법원 재판연구관 4명, 평판사 123명, 예비판사 90명이다.
이들 여성 법관들은 두 달에 한 번 서울 고등법원과 지방법원, 가정법원등이 위치한 서울 강남구 서초동 일대 음식점에서 점심을 함께 먹으며 친목모임을 가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여성법관은 “많으면 30-40명 정도가 모이는 이 모임에서 여성 법관들은 특별한 이슈가 없는 한 육아문제나 직장 문제 등 살아가는 이야기를 주로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간에 늦지 않게 각자의 일터로 돌아가야만 하는 탓에 긴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한다고 했다.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이 모임을 주축으로 1년에 한 번 정도 연말이나 연초에 전국 단위의 여성 법관모임을 가지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다들 일과 가정생활로 바빠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 전국모임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이들은 이번 여성 헌법재판관 지명에 이어 머지않아 여성 대법관도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