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영화처럼 되고 싶어하는 세상이지만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도그빌’(Dogville·8월 1일 개봉)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다. 연극을 흉내내려고 안달복달하는 영화라니. 이 작품에는 연극적 생략과 무대에서 통했던 약속들이 넘쳐난다.
보통 영화들처럼 관객의 감정이입을 유도하려는 시도 같은 건 일찌감치 버렸다. 작고 평온한 산골마을 도그빌이라며 보여주는 화면에는 지붕도 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는 사방이 뚫린 공간의 밑바닥에 금을 그어 집과 길을 구분한 무대를 내내 훑을 뿐이다. 그런데도 배우들은 문이나 벽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연기를 한다.
이야기 도중엔 내레이터(해설자)도 불쑥불쑥 개입한다. 이런 낯선 형식은 관객이 작품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닮았다. 영화 안에서 감상에 빠지는 대신 영화 밖에서 비판적으로 사회를 돌아보게 하려는 노림이다.
착하고 아름다운 여자 그레이스(니콜 키드먼)가 도그빌에 들어오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갱들에게 쫓기는 신세라는 것을 알고 불안에 휩싸인다. 그레이스는 작가를 꿈꾸는 청년 톰(폴 베타니)의 도움을 받아 마을 사람들의 일손을 거들며 호감을 얻는다. 그러나 그레이스를 찾는 경찰의 현상 포스터를 본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변해간다.
라스 폰 트리에는 ‘도그빌’에서 비정한 사회(특히 미국)에 돋보기를 바짝 들이댄다. 약점을 악용해 더 엄청난 요구를 하는 사람들의 악마적 본성이 낱낱이 드러난다. 니콜 키드먼은 선악(善惡)을 한데 포갠 빼어난 연기로 브레히트 희곡 ‘사천의 선인’의 셴테를 빼닮은 그레이스의 캐릭터를 완성시켰다.
‘도그빌’은 내용보다 형식이 돋보이는 영화다. 그러나 연극에서 마이클 커비가 고민했던 형식주의적 무대를 영화로 옮긴 라스 폰 트리에의 실험은 파격적이지만 어떤 감흥으로 뭉쳐지지는 않는다. 라스 폰 트리에는 지루한 동그라미를 그리며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람들과 사회에 염증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트럭 속 사과상자들 틈에 숨어 마을을 탈출한 그레이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