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파 프롬 헤븐

  • 이동진기자

    입력 : 2003.05.18 18:43 | 수정 : 2003.05.18 18:43

    천국과 지옥사이- 파도치는 女心

    자상한 남편과 행복하게 춤을 추는 캐시. 그러나‘파 프롬 헤븐’에서 캐시는 남편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위기에 봉착한다.



    그녀의 삶은 완벽해 보였다. 유능한 회사원인 남편은 자상하고 아이들은
    사랑스러우며, 이웃들은 친절하고 정원 딸린 너른 집은 안락하다.
    여성잡지가 ‘가장 건강한 가정의 주부’로 인터뷰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야근하는 남편에게 밤참을 들고 찾아갔던 어느 날, 남편이 다른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위기는 한꺼번에 찾아왔다. 남편의
    동성애로 고민하던 그녀는 흑인 정원사를 사랑하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의
    냉대를 받게 된다. 그녀의 행복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혹시 그 모든
    조건은 애초부터 언제 발화할지 모를 불씨를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파 프롬 헤븐’(Far from heaven·23일 개봉)은 한적한 소도시의
    거리를 훑으며 평온하게 시작한다. 하지만 조용한 소도시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다룬 데이빗 린치의 ‘블루 벨벳’ ‘트윈 픽스’ 같은 작품들이
    지극히 부드럽게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관객들이라면, 그런 평화가
    혼돈과 격랑을 감추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파 프롬 헤븐’은
    남편(데니스 퀘이드)의 동성애 사실을 알게 되고 흑인 정원사(데니스
    헤이스버트)를 사랑하게 된 이후 캐시(줄리언 무어)의 삶이 요동치는
    과정을 정밀하게 그려간다.

    맑지만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삶을 연기할 사람으로 줄리언 무어를
    능가할 배우는 없다. 이 영화로 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가 됐던
    무어는 유리 같은 삶에 생겨나기 시작한 금을 목도한 뒤 그 삶을
    깨뜨리지 않으려 애쓰는 캐시 역을 훌륭히 소화했다. 사려깊지만
    소심하고, 우아하지만 우울해 보이는 배역에 더없이 적절한 무어는 가장
    작은 동작과 가장 미세한 대사 톤의 변화로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여성의
    심리를 생생히 살려냈다.

    이 영화의 감독 토드 헤인즈는 ‘포이즌’ ‘벨벳 골드마인’ 같은
    작품을 통해 탁월한 감각을 과시해온 스타일리스트. 그는 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50년대 할리우드 멜로의 제왕 더글라스 서크
    스타일을 그대로 빌려왔다. 정원사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를 그린 서크의
    ‘순정에 맺은 사랑(All that heaven allows)’에서 영감을 얻은 이
    영화는 화사한 의상과 인공적인 세트에서 밝은 조명과 고전적인 편집까지
    50년대를 그대로 재현하며 양식적으로 통일된 스타일을 보여준다.

    독일의 거장 감독 파스빈더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커플의
    연령차와 인종차를 넣어 서크의 멜로를 변주했다면, 헤인즈는 인종차와
    동성애 모티브로 메시지가 강렬한 또 다른 작품을 완성했다. 그 자신
    동성애자로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저항하는 영화를 만들어온 헤인즈는
    여성을 남성의 액세서리로 보고, 흑인을 열등한 인간으로 믿으며,
    동성애자를 정신질환자로 여기는 사회에서 고난을 겪는 인물들 이야기를
    통해 편견에 끈질기게 저항한다. 이 영화의 시선의 깊이는 흑인 정원사
    레이먼드가 백인들로부터 멸시에 찬 시선을 받은 직후, 이번에는
    흑인들이 이용하는 레스토랑에 간 캐시가 백안시되는 상황을 묘사하는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데서 잘 드러난다. 멜로로 포장된 이 강력한 사회
    드라마는 결국 차별이란 ‘시선의 폭력’임을 일러준다. 그리고 폭력은
    손이 아니라 눈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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