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영화] 의식잃은 그녀에게 말걸기… ‘그녀에게’

  • 이동진기

    입력 : 2003.04.06 18:37 | 수정 : 2003.04.06 18:37

    스페인을 대표하는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작 ‘그녀에게 ’.식물인간이 된 두 여자를 돌보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그는 더 이상 ‘스페인의 악동’이 아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욕망의 낮과 밤’ ‘키카’같은 작품들에서
    극단적인 캐릭터와 키치적인 스타일(저속하고 천박한 성향을 일부러
    드러내기)을 접합시켜 기이한 영화 세계를 창조해냄으로써 찬사와 경멸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는 ‘라이브 플레쉬’(1997)에서 욕망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보여주며 본격적으로 변화하기 시작, 모성(母性) 탐구
    속에 희망의 메시지를 아로새긴 걸작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으로
    마침내 거장의 필치를 갖게 됐다. 그리고 쉰을 갓 넘긴 알모도바르는
    ‘그녀에게’(Hable Con Ella·18일 개봉)를 내놓았다. 이제 그를 루이스
    부누엘 이후 최고의 스페인 감독이라고 부른다 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잡지사 기자인 마르코(다리오 그란디네티)는 취재를 위해 여성 투우사
    리디아(로사리오 플로레스)를 만난다. 실연의 상처로 쓰라린 나날을
    보내고 있던 둘은 곧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리디아가 투우 경기 도중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자 마르코는 그녀 곁에 남아 돌보기 시작한다.
    같은 병원에는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발레리나 지망생
    알리샤(레오노르 발팅)를 보살피는 남자 베니그노(하비에르 카마라)가
    있다. 베니그노는 마르코에게 리디아를 돌보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것은 의식을 잃은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말을 거는 방법이었다.
    ‘그녀에게’에서 감독이 하고 싶은 모든 말은 ‘그녀와 이야기해요’를
    뜻하는 원제에 함축되어 있다. 알모도바르는 저마다 외로움에 지쳐
    독백만 하던 극중 인물들이 마침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어 대화를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구원의 여린 빛을 심어놓았다.

    ‘그녀에게’는 ‘사람(人)’이 아니라 ‘사람 사이(人間)’에 대한
    영화이다. 여기서 인물들의 관계는 끊임없이 바뀌고 변화하면서도 한
    가지 본질만은 놓치지 않는다. 고독한 타인들이 각자의 마음 속에서가
    아니라 그 마음들 사이의 공간에서 구원을 발견하는 이 영화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연민만큼 아름다운 감정은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알모도바르의 서명과도 같았던 요란한 스타일은 ‘그녀에게’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스타일을 버린 그는 대신 관조를 얻어냈다. 그렇게
    얻어낸 관조를 따스한 눈동자에 담고 알모도바르는 이제 세상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걸기를 시도한다.

    아마도 그의 이력에서 가장 조용한 작품으로 기록될 이 영화는 여성성의
    본질을 다룬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남성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모도바르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넣은 영화 속 무성영
    ‘애인이 줄었어요’에서부터 현대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쉬의 무용극과
    브라질 가수 카에타노 벨로소의 노래까지 다양한 장치들을 동원해 세상을
    위로한다. 느리게 진행되지만 결국 보는이의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야
    마는 화술에 감화된 미국 아카데미 회원들은 올 시상식에서 이 작품이
    영어권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각본상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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