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네마레터/ ‘피아니스트’의 예술가

  • 이동진기자

    입력 : 2003.01.05 17:30 | 수정 : 2003.01.05 17:30

    절망도 구원도 예술의 품안에서





    로만 폴란스키가 ‘피아니스트’란 휴먼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좀 의아스러웠습니다. 그는 ‘차이나타운’이나
    ‘악마의 씨’처럼 체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냉혈 걸작’을 만들어온
    감독인데, 나치 치하에서 고초를 겪은 유태계 폴란드인 피아니스트
    스필만의 실화를 옮겨낸 휴먼 드라마라니요.

    그러나 영화를 보고나자 이해가 됐습니다. 그 자신 유태계 폴란드인이고
    수용소에서 어머니를 잃었던 폴란스키에게 이 영화는 꼭 한 번 만들어야
    했던 작품이란 사실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건 ‘예술가
    스필만’에 대한 ‘예술가 폴란스키’의 동일시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핵심은 ‘예술가의 무력감’이었지요.

    나치 폭격 때문에 스필만의 방송국 연주가 중단되는 장면으로 이 영화가
    시작되는 것 자체가 역사의 폭압 앞에 예술이 얼마나 나약한지
    보여주지요. 영화 초반 유태인 집단 거주지에서 그가 한 일은 같은
    민족을 착취하는 유태인 앞잡이들의 레스토랑에서 연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강제노역장에서 견디다 못해 친구들이 나치에 맞서다
    처형당할 때, 그가 한 일은 은신처에서 몰래 내려다보며 한숨짓는
    일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 밀어닥친 독일군을 피하려 그가 했던 건
    거리의 시체들 사이에서 죽은 듯 누워 있는 일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그는 단 한번도 주먹을 불끈 쥐지 않습니다. 그저 체념어린 표정으로
    끝없이 도망다닐 뿐이지요.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詩)는 죽었다”고 단언했습니다. 귄터
    시비 같은 사람은 ‘전능한 신과의 결별’을 통해 유태인 학살에 대한
    ‘슬픈’ 신학적 설명을 마련하려 했지요. ‘피아니스트’에서 얼핏
    느껴지는 것 역시 ‘그런 참극에 대해 예술이 뭘 할 수 있나’ 하는
    무력감입니다.

    하지만 스필만을 구원한 건 결국 예술이었습니다. 최후의 순간,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되었을 때 “넌 뭐냐”란 질문에 대해 그는
    “피아니스트입니다”라고 대답하지요. 그리고 혼신을 다해 피아노를
    연주함으로써 장교를 탄복시켜 살아남습니다. 음악은 결국 스필만의
    ‘존재 증명’이었던 셈이지요.

    이 영화에서 스필만의 연주가 살려낸 사람은 자기자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유태계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책임이란 살아남아야 하는
    당위로서의 의무”라고 했던가요. 예술가는 스스로를 구원한 뒤에야
    비로소 세상을 위해 뭔가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뭔가’란
    ‘망각과의 싸움’일 것입니다.

    결국 폴란스키가 예술가에게서 발견한 희망은 이런 것이었겠지요.
    스필만이란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생존 자체’를 통해 미친 역사에
    저항하고, 폴란스키란 감독은 ‘그 생존의 기록’을 통해 인간
    마성(魔性)에 저항하는 거지요. 역사적 참극의 비극적 완결은 망각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잊혀진다면 그건 비극의 교훈을 없애는 또 하나의
    비극이 되는 거니까요. 아마도 예술이 첫번째 비극을 막진 못하겠지요.
    하지만 두번째 비극을 막는 데는 미력한 힘을 보탤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종전 후 스필만의 평화로운 연주회로
    끝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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