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망가진 가족 다시 뭉쳤다...‘로열 테넨바움’

  • 박선이기자

    입력 : 2002.03.21 19:04

    개성 만점의 ‘로얄 테넌바움 ’주인공들.괴팍한 아버지 로얄(진 해크먼 ·왼쪽 뒤 서있는 사람)은 가짜 환자다.시계 방향으로,아내 에슬린(안젤리카 휴스턴)과 천재사업가인 맏아들 채스(벤 스틸러) 천재 극작가 마고(귀네스 팰트로)마고의 남편(빌머레이)좌절한 테니스 천재 리치(루크 윌슨)채스의 두 아들,테넌바움 아이들의 오랜 친구인 작가(오언 윌슨)그리고 에슬린에게 청혼한 헨리(대니 글로버)다.강아지 버클리도 가족 일원.



    망가진 가족을 영화에서 만나기란 드문 일이 아니다. 무책임하고
    괴퍅한데다 이기적이며 제멋대로인 아버지가 아이들 인생을 망쳐놓는
    영화도 드물지 않다. 더구나 그 아버지가 결국은 회심하여 가족들의
    해묵은 갈등이 다 풀어지고 사랑을 회복하는 ‘뻔한 결말’을 내놓는
    영화도 결코 드물지 않다.

    그렇게 뻔한 이야기를 전혀 뻔하지 않게 풀어내는 것이 ‘로열
    테넨바움’(The Royal Tenenbaumㆍ 29일 개봉)이다. ‘빌 머레이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Rushmoreㆍ98년)에서 이미 뛰어난 코미디 감각을
    보여줬던 웨스 앤더슨(32)감독은 비틀린 유머로 가득한 문학적 터치로
    뉴욕 퀸즈의 중산층 가족 테넨바움 가(家) 인물들을 뚜렷이
    부조(浮彫)해낸다. 전지적 시점을 가진 해설가(알렉 볼드윈의
    목소리다)의 진술은 소설의 지문을 연상케하며, 연극적으로 양식화된
    인물과 연기는 관객들이 거리를 두고 이 영화를 지켜보게 만든다.

    변호사를 지낸 로열 테넨바움(진 해크먼)은 22년 동안 머물던 호텔에서
    ?겨난다. 돈이 다 떨어진 것이다. 그는 아내와 22년째 별거 중이지만,
    아직 이혼은 안했다. 때마침 아내 에슬린(안젤리카 휴스턴)이 집안
    회계사 헨리(대니 글로버)로부터 청혼받았다는 사실을 알게된 그는
    “암으로 6주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다”며 “가족과 함께 지내게
    해달라”고 조른다.

    덕분에 이들의 세 자녀도 한자리에 모인다. 친자식인 두 아들과 입양한
    딸은 모두 천재. 맏이 채스(벤 스틸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점박이
    생쥐를 교배해 내 사업 수완을 보인 이래 사업가로 성장했고 딸
    마고(기네스 팰트로)는 중3 때 미국 최고 권위의 희곡상을 받은 작가다.
    막내 리치(루크 윌슨)는 테니스 천재. 열일곱에 이미 프로가 됐다.
    그러나 어른이 된 이들은 모두 상처 입은 인간들이다. 채스는 사고로
    아내를 잃은 뒤 두 아들과 일주일에 열여섯번씩 비상대피 훈련을 하고,
    마고는 나이든 남자와 결혼, 새 작품은 전혀 쓰지 못한 채 바람을 피우고
    있다. 마고를 사랑했던 리치는 누나의 결혼 소식에 경기를 망친 뒤 배
    타고 오대양을 떠돈다.

    영화의 매력은 절묘하게 뒤틀리는 대화와 인물들에 있다. “난 언제나
    정말 나쁜 놈 취급을 받아왔지만, 그저 내 스타일일 뿐이요.” “당신은
    나쁜 놈이 아니요, 로열. 이를테면 개자식이지” “그렇게 말씀해주니
    정말 고맙구려.” 이런 식의 대사는 비꼬임으로 가득하지만,
    냉소적으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체온을 간직한 배우들 덕이다. 스타급인
    출연진 중 누구하나 특별히 기울지 않는 앙상블이 뛰어나며, 단연 발군은
    진 해크먼이다. 액션, 스릴러같은 장르 영화에서 장군, 대통령 같은
    권력가로 등장, 권위와 위선을 연기해왔던 해크먼이 여기선 인생에
    실패한 60대 남자의 남루와 씁쓸함을 인간미 가득하게 살려낸다.

    휴스턴은 해크먼의 기괴함을 받쳐주는 기품과 온건함으로 균형을 잡고,
    70년대 ‘뉴욕 영화’의 미아 패로를 연상시키는 기네스 팰트로 역시
    비뚜러진 천재역을 무리없이 소화한다. 연민을 자아내는 매력은 벤
    스틸러와 루크 윌슨이 맡은 테넨바움 형제들도 빠지지 않는다.
    공격성이나 비꼬인 성격에서 가장 아버지를 닮았다고 할 채스역을 맡은
    벤 스틸러는 특유의 과장된 표정으로 웃음을 자아내고, 루크 윌슨도
    상처받기 쉬운 여린 성품을 잘 표현한다. 인종주의에 기댄 농담 등
    지나치게 미국적인(뉴욕적인) 설정과 인물이 한국 관객에겐 ‘약점’일
    수도 있겠지만, 재기넘치는 시나리오 덕에 나중에 DVD나 비디오CD가
    나오면 ‘현대 미국어’ 교재로도 손색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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