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팔지만 카페는 아니고, 책 많지만 북카페도 아닌 이곳

성수동에 들어선 콘텐츠 창작소
현대가 3세 정경선 대표와 의기투합
“콘텐츠 창작자 위한 새 판 깔고 싶어”

39도에 육박하는 폭염이 내리쬐던 지난달 31일. 스치기만 해도 열기가 펄펄 나오는 철공소와 자동차 정비소들이 즐비한 성수동 골목길을 따라 ‘검은색 대문’ 앞에 다다랐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일 만한 문패에 적힌 글자는 ‘안전가옥’.

안으로 들어가니 오토바이 정비소였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세련된 인테리어로 꾸며진 공간은 커피를 팔지만 카페는 아니다. 책꽂이에 꽂힌 책이 꽤나 많은데 북 카페는 아니다. 이곳은 창각자들이 작품 활동을 하는 물리적 공간인 동시에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취향을 교류할 수 있는 커뮤니티다. jobsN이 안전가옥 안주인 김홍익(35) 대표를 만났다. 

◇이야기꾼들의 아지트 꿈꾼다

지난해 이맘때쯤 출범한 안전가옥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이야기 창작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이야기를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안전가옥에 들어올 수 있다. SF, 판타지, 호러 등 장르문학 마니아도 환영이다. 창작자, 마니아들에게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을 주고 이들의 창작물이 널리 활용되는 선순환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만들었다. 

-이런 공간을 만든 배경이 궁금하다.

“안전가옥 모토는 ‘모든 이야기들의 안식처’다. 여전히 장르물을 얘기하면 일종의 선비정신에 입각해서 평가하고 재단하려는 풍조가 있다. 고급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르는 경향 같은 것이다. 다양한 취향의 콘텐츠가 만들어질 수 있는 물리적인 환경과 커뮤니티를 제공하고 싶었다.”

-이야기 창작자란 작가를 말하는 것인가.

“소설책을 쓰는 작가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화, 영화 등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모든 유형의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노벨문학상 받은 작품, 등단한 작가의 책을 ‘좋은 이야기’라 하는데 냉정히 말해서 그런 작품은 재미가 없다. 오히려 공상과학(SF), 판타지를 찾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우리는 실제로 많이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더 잘 만들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

-비즈니스 모델은 뭔가.

“콘텐츠계의 SM엔터나 YG엔터가 되고 싶다. 저작권, 유통권을 우리가 갖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일반적인 자영업과는 달리 창작물이 나올 수 있는 선투자가 필요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민간 버전 정도로 봐주면 좋겠다. 공개할 수 없지만 계약된 작품도 있다. 공모전도 연다. 만 23세 미만 창작자들만 응시할 수 있는 '남정일(남들은 한창 좋을 때 라는데 정작 나는 뭐가 좋은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일단 끄적인 이야기를 내면 되는)공모전과, '한국 근미래 SF 판타지', '냉면 엔솔로지 공모전'을 진행 중이다. 액수를 밝힐 수 없지만 모종의 투자금을 받았다. 이르면 내년 상반기 안전가옥의 이야기를 유통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적 기업 관심 많은 현대가 3세와 맺은 인연이 시작

안전가옥의 출발점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손자이자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아들인 정경선 씨다. 현재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MBA 과정 중인 그는 사회적 기업에 투자하는 에이치지 이니셔티브(HGI) 대표를 맡고 있다. HGI에서 투자하는 소셜벤처는 13곳. 안전가옥도 그중 하나다. 정 씨는 어느 날 고대 동아리 선배였던 김 대표를 만나 ‘글 쓰는 사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가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며 머릿속에 그려둔 사업 얼개를 얘기했다. 학창시절 ‘콘텐츠 오타쿠(덕후)’로 유명했던 정 씨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대표 자리를 맡아달라는 그의 권유를 큰 고민 없이 수락했다.

-제안을 단번에 받아들인 이유는 뭔가.

“원래 문학을 좋아했지만 업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던 분야에서 커리어를 잘 밟아가고 있었고 굳이 리스크를 안고 뭘 해야 할 필요성도 못 느꼈다. 오프라인 사업은 더욱 생소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또 어디서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어느 분야든 진흙탕 싸움이다. 뭐라도 많이 해 보는 것이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 대표와의 신뢰관계도 당연히 영향을 미쳤다.”

-정 대표는 사회적 기업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안다.

“HGI가 안전가옥의 모회사이긴 하지만 정 대표는 안전가옥에서 직함을 갖고 있지 않다. 솔직히 이런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 조심스럽다. 안전가옥은 영리법인이지만 사회적인 미션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있는 창작자들과 수익을 내는 판을 깐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 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소비한 콘텐츠를 통해 행동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콘텐츠 시장의 신생아 같은 존재를 바라보는 안팎의 시각이 궁금하다.

“업계에서는 우리를 흥미로운 시각으로 봐 준다. 특히 한국SF협회는 우리를 너무 예쁘게 봐주고 있다. 지난 5월에는 한국SF협회 창립대회를 안전가옥에서 열었다. 번듯한 공간을 갖고 있는 안전가옥이 협회 회원으로 들어가니 너무들 좋아하셨다.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부분부터 접근하기보다는 창작자들과 함께 수익을 낼 수 있는 판부터 깔아보고 싶다.”

-신진작가들의 호응이 클 것 같다.

“신진작가들에게 어필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기성작가들에게도 매력적인 프로그램이 될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 기존 종이책 시장 판 자체가 쪼그라들고 있어서 우리가 갖는 경쟁력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들로부터 걱정 어린 피드백도 받는다. 쉬운 일이 아니니까. 중간에 지치지 말고 오래 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제일 많이 듣는다.”

◇종이책에 대한 경험 없는 것은 단점인 동시에 장점

이색적인 일을 벌이고 있는 김 대표는 전형적인 제도권 인재였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미디어솔루션센터을 거쳐 카카오 전략팀에서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을 보좌하며 소위 말하는 ‘임원각’을 그리며 살아왔다. 스스로도 “나는 창업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말한다.

-대기업 나올 때 불안하지 않았나.

“사업이 생각만큼 잘 안되면 어떻게 할까란 걱정은 있었지만 개인적인 진로에 대한 불안함은 없었다. 실제 일을 해보니까 경험하는 폭이 진짜 넓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지금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곤하긴 하지만 개인마다 느끼는 차이가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콘텐츠 분야는 첫 시도인데 어렵지 않았나.

“내 단점 중 하나가 종이책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장점이기도 하다. 기존 판에서 돌아가는 공식을 모르니까 ‘다른 것’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이 기존 시장에서 신기하게 보여지는 것 같다.”

-창업에 뛰어드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스타트업은 섹시해 보인다. 남들 앞에서 대표이사 명함을 내놓을 수 있지만 연봉, 복지 같은 것은 포기해야 한다. 나는 회사 다닐 때보다 연봉이 줄었지만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연봉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감내할 수 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것과 포기해야 하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시작한다면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