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진소리만 듣고 기막히게 차종 맞추던 ‘버스덕후’ 지금은…

  • 글 jobsN 이연주

    입력 : 2018.07.25 10:04

    엔진 소리만 듣고도 차종 맞추는 버스 박사
    한국 버스 볼 수 있다면 국내·외 어디든 불사
    "버스의 문화유산 가치 인정받는 날까지"

    이종원(22)씨는 2015년 한 예능 방송에 ‘버스 덕후’로 출연했다. 버스 엔진 소리만 듣고도 기가 막히게 차종을 맞춰 모두를 놀라게 한 그는 ‘이 정도는 고수가 아닌 중수’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4세때 부모님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다니며 버스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한글도 제대로 떼기 전에 버스 노선을 외우고 차종을 구분짓기 시작했다. 즐겨 그리는 그림은 버스였고 모형도 버스만 만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인터넷 버스동호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버스를 깊게 파고 들었다.

    툭 치면 버스의 역사가 입에서 줄줄이 나온다는 그는 2013년부터 ‘버스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이씨가 창직(創職·직업을 만듦)했다. 특정 시대와 상황에 맞는 버스를 찾아준다. 2015년 2월 버스동호회 ‘한국버스연구회’를 만들었다. 버스박물관과 버스대백과사전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씨를 만났다.

    이종원씨, /jobsN

    ◇30~40년 경력 버스 전문가도 인정

    중앙대 공연영상창작학부 사진전공 15학번이다. 전공을 살려 보존가치가 높은 버스 사진을 찍고 영상으로 기록한다. 자료를 저장한 외장하드만 10개째다. 12~13테라바이트를 저장한 셈이다. 학위는 없지만 그는 버스 박사다. 현대자동차에서 ‘버스의 역사’를 강연한 적이 있다. 30~40년 경력의 버스 전문가들은 강의를 듣고 ‘대단하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저 버스에 심취한 덕후는 아닌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해외 발령 받은 아버지를 따라 뉴질랜드로 갔다. 뉴질랜드 사람들이 버스를 좋아한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유물로 인정하고 보존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 받았다. 도시마다 교통 박물관이나 버스 박물관이 있다. 1910년대에 나무로 만든 버스나 전차가 박물관 안에서 돌아다닌다. 인구 450만 국가에서도 이렇게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의식을 느꼈다. 의복이나 그릇은 세세하게 보존하면서 버스는 유독 찬밥이다. 마니아나 덕후만 즐길 게 아니라, 대중들도 버스의 가치를 알아야한다 생각했다. 박물관과 사전을 만들어 버스를 유물로 보존하고 역사를 기록하기로 했다.”

    -버스 컨설턴트로 일한 계기는.
    “첫 일거리는 2013년 들어왔다. tvN에서 내 블로그를 보고 보고 연락했다. 1994년 배경 드라마를 만든다고 했다. 94년식 버스는 멸종해서 비슷한 느낌의 버스를 수소문했다. 알고보니 그 드라마가 ‘응답하라 1994’였다. 이후 요청이 종종 들어왔다. 영화 ‘더킹’, ‘마약왕’, 드라마 ‘라이프온마스’에 나온 버스도 섭외했다.”

    1988년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등장한 현대 에어로600 버스. /OCN 드라마 '라이프온마스' 캡처

    -'어떤 버스가 필요하다'하면 바로 차종이 떠오르는가?
    “몇 년도에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만 알면 떠오른다. 직접 정리한 자료도 있다. 한국 중고차는 러시아나 동남아 등에 수출하는데, 이 버스들은 차대번호(일종의 자동차 주민등록번호)를 추적해 찾는다. 버스에 대한 정보만 주거나 버스 차주를 직접 연결하기도 한다. 정보 수준에 따라 10만~30만원, 많게는 100만원 정도 받는다. 아직 생계를 유지할 수준은 아니다.”

    -섭외하기 어려운 버스가 있었나?
    “항상 어렵다. 버스가 남아있지 않다. 가령 80년대 버스는 국내에 3~4대 정도밖에 없다. 디자인이 최대한 비슷한 버스를 찾는다. 같은 버스를 색이나 외부 광고만 바꿔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응답하라 1994와 1988에 나온 버스가 같다. 그래서 응답하라 1988에 옥의 티가 있다. 류준열과 혜리가 만원버스에 탄 장면을 보면 에어컨이 달려있다. 그때만 해도 냉방 시설이 있는 버스는 없었다.”

    실제 서울 20-2번 버스와 드라마에서 재현한 버스. 첫번째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실제 차종은 현대 RB520L이다. 하지만 국내 남아있는 차량이 없어 대우 1996년식 BS106버스로 대신했다. 80년대 버스 설정임에도 냉방시설이 달려있는 걸 볼 수 있다. /이종원씨 제공,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캡처

    ◇버스는 움직이는 문화 유산

    -우리나라 최초의 버스는 무엇인가.
    “국내 최초 시내 버스는 1928년 등장했다. 경성부청(서울시청)이 일본에서 20인승 대형버스 10대를 들여왔다. 이때부터 안내양이 있었다. 광복 이후 버스가 사라졌다가 1949년 서울시에서 허가받은 버스회사들이 운행을 시작했다. 50~60년대엔 하동환자동차에서 미군 폐차 부품으로 만든 버스가 거리를 누볐다. 하동환자동차는 쌍용자동차 전신이다.

    68년 전차가 더이상 운행하지 않아 74년 지하철 개통까지 버스가 유일한 교통수단일 때가 있었다. 버스 안팎이 혼잡해 교통사고가 잦았다. 엔진이 버스 앞에 달려 소음이 심했고 차체가 높아 노약자가 타기 어려웠다.”

    -이후 버스는 어떻게 발전했나.
    “82년 자동문이 생기고 인건비가 오르면서 안내양 수가 줄기 시작했다. 혼잡할 때만 안내양이 있었다. 안내양이 있을 땐 승객이 중문으로 타서 안내양에서 돈을 주고, 앞문으로 내렸다. 안내양이 없을 땐 앞문으로만 타고 내렸다. 84년에야 돈을 먼저 내는 선불제가 도입됐다. 이때부터 앞문으로 타서 중문으로 내렸다. 80년대 후반 아시안 게임, 올림픽 게임이 열리면서 버스가 발전했다. 정부에서 차체가 전보다 10~14cm  낮은 저상버스를 만들었다. 엔진도 뒤에 달려 소음이 줄었다.

    냉방시설은 95년부터 달았다. 주황색 버스가 에어컨이 있다는 뜻이었다. 90년대 후반에는 모든 버스가 에어컨을 달았다.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2000년대 저상버스, 굴절버스, 천연가스 버스 등 다양한 버스가 등장했다. 앞으로는 전기 버스가 대체할 거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1980년 버스 모습,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 서울역 앞에서 시위대와 RB520L 버스. /이종원씨 제공

    -버스의 문화유산 가치는 무엇인가.
    “버스는 움직이는 문화유산이다. 과거와 현재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 버스 요금으로 물가를 파악하지 않나. 62년에는 5원이었다. 현금에서 토큰·회수권, 교통카드로 지불 수단이 변했다. 또 버스에 달린 광고만 봐도 당시 유행 제품, 정부에서 주도한 정책을 알 수 있다. ‘차선을 지킵시다’, ‘로케트 밧데리’ 같은 광고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거다.

    지역적인 관점에서도 중요하다. 옛 버스노선에서 볼 수 있는 화신백화점·미도파·중앙청 등은 시대를 잘 보여주는 지역명이다. 또 버스는 역사적인 순간에 중요 역할을 했다. 4·19 혁명 사진을 보면 버스가 있다. 60년대 베트남으로 버스를 수출했다는 점에서 우리 기술 수준을 알 수 있다. 실미도 사태도 버스에서 일어났다. 광주 5·18 민주화 운동 등 시위 때 사람을 보호하고 부상자를 옮겼다. 성수 대교 참사에서 버스가 추락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고, 2002 월드컵 때는 버스 위에서 응원했다. 버스는 역사와 추억 속에 함께했다.” 

    2017년 미얀마 답사 때 만난 1980년대 대표 시내버스 현대 RB520L. /이종원씨 제공

    -국내 버스 보존 상황은 어떤가.
    “1912년 일본인이 버스 운행을 시작했다. 100년이 넘었지만 체계적인 자료가 없다. 연구는 둘째치고, 모두 수출하거나 폐차해 보존 자체를 못하고 있다. 그나마 남아있는 건 현충원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운구버스나 서울올림픽 때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IOC) 위원장과 귀빈이 탄 버스다. 시민들이 탄 버스는 전혀 보관을 안 한다. 한국이 자동차 생산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데, 이에 비해 버스 보존·관리 수준은 격이 맞지 않다.

    그나마 남은 버스도 정부가 노후 경유차를 폐차하도록 권장해서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영화를 촬영할 때 버스를 빌려주는 회사들이 있긴 하지만 몇대 뿐이다. 촬영 끝나고 폐차하는 경우도 많다. 버스가 부피가 커 유지관리비가 많이 든다. 하지만 전시용으로 영국에서 2층 빨건 버스는 1억~2억원을 주고 사오면서 한국 버스는 천대하니 안타깝다.”

    -해외는 어떠한가.
    “러시아·영국·뉴질랜드·호주가 버스를 잘 보존한다. 국민이 버스에 애정을 갖고 있다. 영국과 뉴질랜드에서 버스는 민속문화재다. 러시아는 2014년 모스크바 시내버스 90주년을 맞아 행사를 연 이후 매년 버스 축제를 한다. 1930~40년대 버스가 시내를 돌아다닌다. 시승체험을 하려면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MBC 예능 '능력자들' 출연 모습. /이종원씨 제공

    ◇모두가 공감하고 소통하는 장소 ‘버스’

    2015년 2월 대학 최종합격 통지서를 받자마자 러시아로 떠났다. 러시아에 있는 한국 버스를 보기 위해서다. 답사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고등학생 때 러시아어를 독학했다. 현지 동호회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마음껏 버스를 보고 사진을 찍었다. 이후 미얀마·라오스 등으로 답사를 갔다. 국내에선 안가본 곳이 없다.

    국내 버스 내구연한(사용기간)은 9~11년이다. 기간을 채우고 나면 버스를 폐차하거나 해외로 수출한다. 문제는 ‘한국 최초의 굴절버스’처럼 역사적인 버스조차 모두 없애거나 수출한다는 점이다. 50~70년대 버스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80~90년대 한국 중고 버스는 2000년부터 러시아·중국·미얀마·몽골·카자흐스탄 등으로 수출됐다. 이씨는 해외에 있는 한국 중고 버스를 다시 국내로 들여오고 있다. 비용은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대포차로 사용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개인이 버스를 사올 수는 없다. 국내·외 기업과 협력한다.

    -해외 답사에서 어떤 버스들을 만났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버스들이 있다. 대우 BF101과 현대 FB485는 미얀마에 있었다. BF101은 3만8000대가 팔린 베스트셀러다. 80년대에 살았다면 익숙할 거다. FB485도 80년대를 주름잡았다. 국내 회사와 미얀마 현지 회사 도움으로 두대 모두 2018년 2월에 한국으로 갖고 왔다. 전북이나 충북 등에 보관한다.” 

    첫번째 사진은 대우 BF101, 두번째 사진은 현대 FB485. 아래 두 사진은 미얀마에서 운행 중인 대우 BF101과 현대 FB485다. BF101은 '프론트 엔진 버스이고 길이는 '10.1m'라는 뜻이다. FB485는 '프론트 엔진 버스'이고 휠베이스(앞바퀴의 중심과 뒷바퀴의 중심 거리)가 약 '4.85m'임을 뜻한다. /이종원씨 제공

    -박물관에 어떤 버스를 전시할 예정인지.
    “버스연구회 후원금으로 구입한 BS120CN까지 지금 3대를 갖고 있다. BS120CN은 국내 최초 초저상버스다. 그 다음은 실미도 사건 때 신진 FB100LK 버스를 복원할 생각이다. 같은 설계로 만든 일본 버스가 미얀마에 있어 역수입할 생각이다. 이처럼 상징적 의미가 큰 버스 15대를 전시하고 싶다.”

    -박물관 건립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 건가.
    “확보한 버스는 복원하고 있다. 해외에서 문위치를 개조해서 다시 원래대로 돌려놔야 한다. 미얀마에서 쓰던 버스는 수출 당시 천연가스로 개조했는데, 다시 디젤로 복원중이다. 또 앞으로 지자체에 박물관 건립을 제안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한국 버스 대백과사전 편찬을 위해 국토부 관계자와 협의 중이다. 또 2019년 서울 시내 버스 70주년을 맞아 버스 축제를 기획하고 있다.

    버스는 사람들에게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중장년층 뿐만이 아니다. 20대도 1990~2000년대 버스를 보고 추억을 떠올린다. 버스야말로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장이다. 버스 박물관과 축제는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 흥행요소가 있기 때문에 꼭 꿈을 이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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