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발로 걸을 수 없지만, 두길을 걷는 의사·변호사입니다

20년전 스키장서 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 딛고 의사·변호사 자격 모두 취득
“월·수·금 의사, 화·목·토 변호사로 일할 것”

“하반신 마비입니더. 앞으로 걷기 힘듭니데이.”

2005년 2월 2일, 스물 한살 꽃다운 청년이 병상에서 눈을 뜨자마자 들은 첫 마디다. 당시 인하대 의대 2학년에 재학 중인 박성민(34)씨는 얄?게도 자신이 공부하던 인하대 부속병원에서 1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 처음엔 다시 걸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극한의 재활훈련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다시 걷는 건 영화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농사일도 미루고 병실을 지키는 부모님, 그의 얼굴을 그려진 티셔츠를 만들어 판 돈으로 병원비에 보태라는 친구들, 수시로 병실을 찾아와 위로를 전한 교수님들을 보며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결과 박씨는 남들은 하나 갖기도 힘들다는 전문직 자격증을 두 개나 얻었다. 의사에서 변호사로 다시 의사로 그야말로 ‘무한도전’을 이어가는 박성민씨를 만났다. 그는 현재 인하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직업환경의학과 전공의 과정을 밟고 있다.

◇’수재’ 소리 듣던 청년, 하반신 마비 장애인 된 이유

박씨는 고향 인천에서 알아주는 ‘수재’였다. 그의 꿈은 엔지니어.  2003년, 카이스트와 서울대 공대에 동시에 합격하고 카이스트로 진로를 정했다. 카이스트에서 봉사활동을 나갔다가 느낀 바가 있어 진로를 바꿨다. 그는 이듬해 인하대 의예과에 입학했다.

-왜 의대로 진로를 바꿨나?

“카이스트에서 독거 노인 봉사활동을 나갔어요. 그곳에서 아무도 찾지 않아 외롭게 사는 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어쩌다보니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순간 같이 있었습니다. 세상과 작별하는 할머니의 눈빛이 아른거렸어요.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쩌다 사고를 당했나?

“예과 2학년이 끝나갈 무렵, 좋아하는 여학생을 따라 스키 동아리에 가입했죠. 어떻게든 그 친구와 친해지고 싶어서 한번도 타본 적 없는 스키에 도전했죠. 1월 한달을 스키장에서 살다보니, 실력이 꽤 늘었어요. 그리고 일이 벌어졌던 2월 1일, 그날 따라 기고만장 했어요. 보드 묘기를 부리는 하프파이프에 들어갔죠. 점프를 한 순간, 그만 무게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어요. 허리가 순식간에 부러지고 보드가 산산조각 났습니다. 구급차에 실려 오는 동안 너무 아파 기절했어요. 눈을 떠보니 인하대 병원이였습니다.”

-공부할 때 힘들지 않았나?

“ 다른 사람들은 공부하는 중간에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는데 저는 항상 앉아 있어야 해서 허리가 아팠어요. 시험기간에는 하루에 20시간을 내리 앉아 있기도 했어요. 원래 의대 건물에는 장애인 화장실이나 경사로가 없고 계단만 있었어요. 해부실습실 갈때는 계단이 많아서 돌고 돌아 20분이나 더 걸려 도착했습니다. 해부학 실습대가 높아 손을 움직이기도 어려웠죠. 그래도 앉아서 할 수 있는게 공부뿐이라 최선을 다했습니다.”

-힘든 일을 겪어서 ‘멘탈’이 무너졌을텐데, 어떻게 극복했나?

“극복은 못했습니다. 요즘도 문득 ‘아 맞다. 나 장애인이지’ 하고 놀라요. 그냥 익숙해질 뿐이죠. 여자한테 수도 없이 차였어요. 여자친구 만들고 싶어서 교회도 다니고, 동호회도 다니고, 길거리 헌팅도 했거든요(웃음). 친구들은 다 결혼했는데 걱정입니다. 전 분명 웃고있는데 왜 슬프죠. 하하. 친구들과 맛집에 놀러가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 계단이 많을때 좀 미안해요. 저 때문에 모두가 다른 곳으로 가거든요. 순대국밥 참 좋아했는데, 다치고 나서 가기 힘들다는 것도 있네요.”

◇의사 꿈 뒤로하고 변호사가 된 이유

이를 악물고 공부한 끝에 그는 2010년 2월 의대를 차석으로 졸업하며 의사 면허를 땄다. 이와 동시에 서울대 로스쿨에도 합격했다. 3년간 공부 끝에 2013년 제2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됐다. 남들은 하나 따기도 힘든 전문직 자격증을 두 개나 거머쥔 이유는 무엇일까.

-왜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 먹었나?

“현실적으로도 휠체어를 탄 채 다른 사람들을 잘 치료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걸렸어요. 마침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이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술자리에서 ‘당구장 주인이 100원을 주우면 점유이탈 횡령죄냐, 절도죄냐’로 토론하는걸 듣다보니 법학에 흥미도 생겼고요.”

-로스쿨 입시 준비는 힘들지 않았나?

“본과 공부를 하면서 로스쿨 입시 준비도 병행했습니다. 앉아있는 시간이 길 수 밖에 없으니까요. 특히 재활원에 있을 때 안 형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인하대 병원에서 8개월을 있다가 서울 수유동의 국립재활원으로 옮겼어요. 국립재활원은 척수 손상 환자들이 재활 훈련을 받는 곳입니다. 그 곳에서 안 형은 교통사고로 사지마비 판정을 받았는데 경찰조사까지 받으면서 힘들어 하더라고요. 사고 당시 운전하던 친구가 그 형한테 음주운전 책임을 떠넘겼다고 하더라고요. 꼭 변호사가 되서 이런 일을 바로잡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했습니다.”

◇월·수·금은 의사, 화·목·토는 변호사로 일하는 게 목표

그의 변호사 생활은 길지 않았다. 1년 정도 변호사로 활동한 그는 2014년 뒤늦게 모교로 돌아와 전공의 생활을 시작했다. 여러 과를 돌아야했던 인턴 때는 다소 힘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직업환경의학과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상황에 맞는 역할을 찾았다고 한다.

-뒤늦게 병원으로 돌아온 이유는?

“변호사로서 폭넓은 사건을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의사 면허 때문인지 의료 관련 사건만 들어왔어요. 사실 의대를 졸업하고 바로 로스쿨에 진학했기 때문에 진짜 의사로 일해본 적은 없잖아요. 의무 기록을 봐도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의료소송을 잘 다루기 위해서라도 임상 경험을 해야겠더라고요. 2013년 인하대학교 전공의 과정에 지원해 올해로 레지던트 4년차예요. 까마득한 후배의 후배지만,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직업환경의학과는 생소하다. 어떤 일을 하는가, 이 과를 택한 이유는?

“직업환경의학과는 직업이나 산업재해, 작업관련 질환의 원인을 연구합니다.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다른  의학과는 달리 질병을 일으킨 원인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죠. 이 때문에 논문을 찾아보는 식의 연구를 많이 해요. 수술이 없으니까 제겐 딱이죠. ”

-그래도 일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

“인턴 시절 환자들의 피를 뽑거나 주사를 놓을 때 침대가 높아서 힘들긴 했어요. 그런데 적응하니까 할만하더라고요.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하고 나선 병원 안에선 큰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가끔 출장을 나갔을 때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라면 좀 막막하긴 하죠. ”

-올해가 전공의 마지막해다. 전문의 자격을 따고 나면 변호사와 의사 둘 중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월·수·금요일은 의사로, 화·목·토요일은 변호사로 일할까 생각 중 입니다. 재판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 진료 스케쥴도 잘 조정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