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졸자는 줄을 섰는데… 대기업 일자리 9만개 줄었다

지난 2월 서울 소재 대학을 졸업한 김모(25)씨는 이번에 수능 시험을 6년 만에 다시 본다. 대학 졸업을 한 해 미뤄가며 대기업 정규직 공채에 수차례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한 뒤 "평생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의과대학에 가겠다"며 뒤늦게 재수(再修)에 나선 것이다. 김씨는 "재수 학원 같은 반에 괜찮은 대학을 나오고도 대기업 입사를 못하자 의대 등에 다시 도전하는 이들이 여러 명 있다"고 했다.

김씨처럼 취업 전선에서 좌절을 겪고 인생행로를 바꾸는 이들이 적지 않다.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대졸자들이 선호하는 일자리인 대기업의 취업 문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한 해에만 국내 대기업 일자리가 9만개나 줄었다. 통계청은 21일 이런 내용을 포함한 '2016년 기준 일자리 행정 통계 결과'를 발표했다.

◇작년 대기업 일자리 9만개 줄어

통계청의 일자리 행정 통계는 작년 말과 지난 2015년 말 일자리 수를 비교한 것이다. 작년 전체 일자리는 2323만개로 2015년(2301만개)보다 22만개 늘었다.

하지만 대기업의 일자리는 9만개 줄어 368만개가 됐다. 새로운 회사가 생기거나 기존 회사가 사업을 확장하면서 일자리 17만개가 새로 생겼지만, 반대로 폐업이나 사업 축소로 없어진 일자리가 26만개나 됐던 탓이다. 이번 통계에서 대기업은 업종별로 매출이 400억~1500억원을 넘고 고용 여력이 있는 업체를 뜻한다. 종업원 300명 이상인 대기업은 3800곳에 이른다.

지난 2015년에 대기업 일자리가 7만개 늘었던 것과 비교하면 작년에 상황이 크게 나빠졌다. 국정 농단과 대통령 탄핵 사태 속에 기업들이 신규 투자와 고용을 꺼렸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취업 준비생인 청년층에겐 중소기업보다 월급이 많고 근무 여건이 좋은 대기업에 취업할 기회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작년 기준으로 대기업 근로자 평균 월급은 474만원으로 중소기업 근로자(224만원)의 2.1배 수준이었다. 취업 문이 좁아지면서 지난달 청년 실업률은 8.6%로 10월 기준 1999년 이후 1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13조원 투자 반도체, 일자리는 650개

대기업 일자리가 급감하는 배경에는 전통 제조업의 쇠퇴, 신(新)산업의 고용 없는 호황, 대기업의 해외 진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성재민 노동연구원 동향분석실장은 "작년에 조선 등 전통적 제조업에 구조조정 바람이 불면서 대기업 일자리가 줄었고, 이때 밀려난 베이비붐 세대가 자영업으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작년 한 해 동안 제조업 일자리는 14만개 줄었고 음식·숙박업 일자리는 2만개 늘었다.

주력 산업인 반도체는 수출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일자리 창출은 미미하다. 삼성전자가 작년 13조원을 투자했지만 1년간 늘어난 반도체 고용 인원은 650명에 그쳤다. SK하이닉스도 6조원을 투자했지만 대졸 신입 사원 채용은 250명에 머물렀다.

최근 대기업들은 과거처럼 외형 성장이 어렵게 되자 비용 절감을 위해 고용을 최소화하고 있다. 작년 매출액 1조원 이상 상장사 182곳의 직원 수는 100만2326명으로 1년 만에 1만5000명이 줄었다. 1년 사이 이 기업들의 매출은 8조3000억원, 영업이익은 6조5000억원 늘었는데 직원 수만 감소한 것이다. 또 높은 임금과 강성 노조를 피해 해외로 공장을 옮기는 대기업이 늘어나면서 좋은 일자리를 외국에 빼앗기고 있다. 삼성전자의 해외 고용은 지난 2012년 24만명에서 2015년 33만명으로 늘었다. 반면 국내 고용은 작년 9만3200명으로 한 해 만에 3700명(3.8%) 줄었다.

정보통신 혁명과 자동화도 좋은 일자리를 잠식하는 요인이다. 자동화 기기를 도입한 '무인(無人) 점포' 확산은 은행권 일자리를 줄이고 있다. 은행 지점은 작년 한 해에 175개가 사라졌고, 올해도 285개가 감소할 것으로 금융 당국은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