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석, 트럼프, 김연아…매일 유명인만나는 직업

  • 글 jobsN 감혜림

    입력 : 2017.04.14 09:46

    문과 학부·대학원…취업 어렵다는 인문학 코스
    캐나다 워홀 사람 만나며 적성 깨달아
    경단녀 2년만에 밀랍인형 박물관 재취업

    "학생 여러분, 밀랍인형은 누가 만들까요? 신체 부위별로 전문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눈을 만들기 위해서는 크기는 물론이고 눈동자와 흰자위 색깔까지 확인합니다. 또 머리카락 부분에는 실제 사람 머리카락이 최대 50만개 들어갑니다." 

    서울 중구에 있는 밀랍인형 박물관 '그레뱅뮤지엄'. 교육과 운영을 맡은 설은경(34) 학예사(큐레이터)가 관람하러 온 초중고교생에게 밀랍인형에 대해 설명하자, 학생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학예사는 박물관·미술관 등에서 전시회를 기획하고 소장품을 관리하는 업무를 한다. 한국고용정보원 기준 학예사 연봉은 2784만~4055만원으로, 평균 3845만원이다.

    그레뱅뮤지엄 서울에 전시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지드래곤 밀랍인형. /jobsN

    1882년 프랑스에 처음 생긴 그레뱅뮤지엄은 정치인, 연예인같은 유명인을 모방해 만든 밀랍 인형을 전시한다. 관광 명소로 유명해지면서 체코 프라하, 캐나다 몬트리올, 서울에 진출했다. 유명인의 실제 사이즈를 재고 본을 뜬다. 인형 1구를 제작하려면 6개월 정도가 걸리고 1억원이 든다. 한국에는 김수환 추기경,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가수 지드래곤, 방송인 유재석씨 등을 본딴 인형 80여구가 전시돼 있다. 평일 500명, 주말에 1000명이 방문한다.

    그레뱅뮤지엄의 유일한 학예사인 설씨는 일반 대기업 취업에 불리한 스펙을 쌓았다. 동덕여대 불문과 출신으로 국문학을 이중전공했다. 대학원을 나왔지만 연구직에 더 적합한 인류학과라 취업문은 좁았다.

    진로를 찾지 못하고 스물여덟,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도 했다. 커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1년을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 부설 박물관에서 일하다가 출산·육아로 경력단절이 됐다. 이후 2년 공백을 깨고 그레뱅뮤지엄에 입사했다.

    그레뱅뮤지엄을 찾은 청소년 대상으로 교육하는 설은경 학예사 /그레뱅뮤지엄 제공

    ◇ '기업과 안 맞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서 벗어나

    설 학예사는 2015년 그레뱅뮤지엄 서울점이 개관할 때 입사했다. 소장품을 관리하는 학예사 고유의 업무와 교육 매뉴얼 제작, 밀랍인형 유지보수 등 운영 업무도 한다.

    그레뱅뮤지엄은 박물관이면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다. 설씨는 대학 졸업 후 바로 대학원에 갔고, 주로 정부 프로젝트나 대학 부설 박물관에서 일했기 때문에 사기업은 처음이었다.

    "대학생 때부터 스스로 기업보다는 공공기관에 맞는 사람이라고 여겼어요. 이익을 내는 게 우선인 일반 회사는 제 성격과 안 맞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입사해보니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이미 체계가 잡혀 있는 공공기관에 비해 오히려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고 시도하기 좋았습니다."

    입장료를 받기 때문에 공공기관에  비해 관람객 숫자 등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목표와 성과가 뚜렷했다. "재밌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데 온전히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는 게 신선했습니다."

    박물관을 알리고 다양한 관람객이 찾도록 아이디어를 짰다. 학생·교사·학부모에게서 의견을 받기도 했다. 자유학기제 등 교육 정책에 관심을 갖고 찾아봤다. 밀랍인형 주인공을 테마별로 묶어 직업을 접목한 프로그램 등을 만들었다.

    학예 업무 외 다양한 일을 해보는 것도 좋았다. 입사 초기 동료 한 명과 운영 관리 매뉴얼을 만들었다. 그동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인력 운용 부문에서는 '노무사 시험을 준비해볼까' 생각이 들 정도로 관련 정보를 모았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설씨가 만든 매뉴얼을 쓴다. 최근에는 동료들과 식사를 하다가 회사에 '옥상 정원'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박물관이 주말에도 문을 열기 때문에 평일과 주말 번갈아 쉰다. 주말에 사람이 몰리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주로 일하는 학예사의 휴일은 주말 대신 해당 기관이 쉬는 날인 경우가 많다.

    설은경 학예사 뒤쪽에는 밀랍인형의 손과 팔 부분이 진열돼 있다. /그레뱅뮤지엄 제공

    ◇ 배고픈 인문학 코스…방황하다 워홀 떠나기도

    그는 '취업 안되고 돈 못 번다는 인문학' 코스만 밟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양대 인류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교양 수업에서 접한 유물을 발굴하는 고고학을 깊이 공부해보고 싶었다.

    "취업하기 좋은 스펙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취업을 못해 대학원에 간 건 아닙니다. 고고학에 관심이 생겨 연구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사람 상대하는 일은 잘 못할 것 같았거든요. 집에 돈이 많은 건 더더욱 아니었어요."

    발굴 프로젝트에 참여해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다. 대학 부설 박물관에서 학예연구원으로도 일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동료들을 만나 사고의 폭이 넓어졌다.

    석사과정 2년을 마쳤지만 논문을 못썼다. 설씨의 관심사는 발굴과 관련된 통계나 과학적인 방법보다는 문화적 배경을 찾는 것이었다. 석사 논문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주제였다. 해외서적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영어를 잘 못하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3개월 간 토플학원을 다니며 하루 200개씩 단어를 외웠다.

    2010년 한국 나이로 28세. 논문을 쓰지 못한 채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영어를 잘하고 싶었어요. 또 하고 싶은 일을 찾자는 갈망이 컸습니다. '해외에 나가면 전환점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캐나다의 유명 체인 커피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급은 10.5달러. 베트남, 티벳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동료를 만났다. 박물관, 문화센터에서 자원봉사도 했다. "여러가지 문화를 다루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직업이 내게 잘 맞는다"라는 걸 깨달았다.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와 정부 산하 현대사 진상규명위원회 한 곳에서 조사관으로 일했다. 전쟁 피해 경험이 있는 노인 계층을 직접 인터뷰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해 조사하는 일이었다.

    이후 경력인정기관인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근무했다. 전쟁 피해자 유골 발굴 경험을 기반으로 논문을 써 석사 학위 취득 후 학예사가 됐다.

    학예사는 정학예사(1~3급)과 준학예사로 나뉜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관하고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한다. 준학예사는 학위에 상관없이 응시할 수 있다. 자격 시험에 합격한 후 학력별(학사·전문학사 등)로 경력인정기관에서 1~5년 이상 경력을 쌓으면 자격이 생긴다.

    정학예사는 준학예사 자격이나 석박사 학위를 가지고 1~4년간 경력인정기관에서 실무 경력을 쌓으면 딸 수 있다. (학예사 자격증 제도 안내www.museum.go.kr/site/main/content/curator_certificate_schemes)

    "학예사는 유물 관리 업무가 많아 꼼꼼한 성격이 잘 맞습니다. 유물이나 소장품에 대한 지식을 쌓는 건 기본입니다. 관람객 대상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해서 사람과 문화에 관심이 많은 게 도움됩니다."

    올해 초 들어온 방송인 유재석씨를 본따 만든 밀랍인형. 사진 가운데와 오른쪽은 가수 지드래곤 밀랍인형을 만드는 장면이다. 대부분 유명인의 사이즈, 피부색 등을 직접 보고 만든다. 주인공이 사망하거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사진이나 영상을 활용해 최대한 실제 모습과 비슷하게 만든다. /그레뱅뮤지엄 제공

    ◇ 경단녀 2년 어렵게 재취업 '육아맘 오히려 장점'

    2013년 박물관 퇴사 후 출산과 육아에 전념했다. 말로만 듣던 '경력 단절 여성'이 됐다.

    2년 후 아이가 자라면서 재취업을 알아봤다. 처음에는 나이나 결혼 여부로 차별하지 않는 공공기관 위주로 알아봤다.

    '육아맘'은 입사지원서를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주로 아이가 잠든 밤에만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남편이 아이를 봐주는 주말에는 동네 커피점으로 나갔다. 자기소개서를 쓰다보면 3~4시간이 빠듯했다. 아이가 아파 최종 면접 직전에 떨어진 적도 있었다.

    그즈음 그레뱅뮤지엄 학예사 채용 공고가 올라왔다.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학예사 자격이 있어 잘 맞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반 기업이라 육아맘을 차별할 것이라는 걱정도 했다.

    채용이 결정되고 면접에 들어왔던 상사가 "육아맘이라 오히려 좋게 봤다"라고 말해줬다. 박물관에는 남녀노소 다양한 연령대 관람객이 오기 때문에 육아 경험이 있으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입사한 지 3년째. 박물관 업무와 관람객에 대한 정보가 풍부해졌다. "밀랍인형을 활용해 스토리가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습니다. 해외 관광객이 많이 오기 때문에 국가별 맞춤 교육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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