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홍대, 강남에서 입어도 예쁜 한복···, 52개국에서 찾는 'K패션'

이불집 하던 부모님 손재주 물려받아
'장녀' 책임감 때문에 공무원 꿈꿔
52개국에 수출, 한복 생태계 만드는 30대 대표

"멕시코와 브라질에서는 화려한 색을 좋아하고, 북미는 모던한 느낌을 찾아요. 동남아에서는 의외로 전통적인 디자인을 좋아합니다. 두바이, 카자흐스탄 같은 중동에서 주문이 들어올 때는 정말 놀랐어요. 최근에는 터키에서도 인기가 좋습니다. 저희를 모방해서 만드는 분들도 생겼어요."

미국과 유럽을 포함해 전세계 52개국에  '한복'을 파는 청년이 있다. 2006년 8월 한복패션기업 ‘손짱’을 연 황이슬(30) 대표다. ‘고리타분한 한국 전통 복식’이라는 낡은 편견을 깨고 '한복 열풍'을 이끌고 있다.

그는 직접 디자인한 한복을 온라인으로 주문 받아 판다. 청바지나 짧은 치마, 블라우스와 함께 입어도 어색하지 않도록 한복을 디자인한다. 2016년 매출은 15억원. 본사 직원 수 9명이다. 인터넷으로만 고객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판다. 운영하고 있는 브랜드는 2가지. '손짱디자인한복'은 명절 뿐만 아니라 파티나 연주회에서 입을 수 있는 디자인 한복이다. '리슬(lessle)'은 격식을 차려 입는 '예복'이 아닌 일상에서 캐주얼하게 입을 수 있는 한복 라인업이다. 손짱은 한벌에 30만원대, 리슬(lessle)은 10만~20만원대다.

창업 초기에는 한국 고객밖에 없었지만 요즘에는 해외 현지인들이 영어로 만든 손짱 인터넷 사이트에 방문해 주문한다. 매출에서 해외 판매비중은 10%내외. 올해 유럽 기업과 계약을 맺어 유럽 패션 시장에 진출할 예정이다. 예상 매출액은 30억원.

◇진짜 한복을 위해서 

“한복을 ‘우리 고유의 것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입어서는 안 됩니다. 한복은 패션이에요. ‘예쁘다’, ‘따라하고 싶다’는 원래 욕망을 자극하는 우리 옷을 만들고 있습니다.” 

황 대표는 한복을 'K패션' 혹은 '한주얼(한국+캐주얼)'로 부른다. K팝, K푸드 뿐만 아니라 '우리 옷'으로도 해외시장에서 승산이 있다는 말이다.

파티를 즐기고 코스튬 문화(국가·시대별 옷을 입는 것)가 발달한 해외에서 한복을 찾고 있다.  한국적 색감과 디자인에 빠진 외국인과 한인들이 주요 고객들이다. 황 대표가 만드는 한복이 국내외에서 인기 있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예쁘다. ‘전통 옷’하면 떠오르는 고리타분함이 없다. ‘한눈에 봐도 사고 싶은 옷’이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같은 강렬한 색부터 남색, 버건디(레드 와인 색상), 베이지 처럼 차분하고 무난한 색까지 다양하다. 자잘한 꽃무늬나 문양을 이용해 세련된 인상을 준다. 지퍼를 달거나 주머니를 달기도 한다.

둘째, 실용적이다. 한복에 주로 쓰는 모시, 무명, 명주, 옥사 대신 면이나 린넨, 코르듀이, 폴리에스테르로 만들어 세탁하기 쉽다. 저고리라도 재킷처럼 입거나 흰 셔츠 혹은 블라우스 대신 입을 수 있다. 저고리 없이 원피스로 된 치마만 입어도 예쁘다. 크기도 스몰(S)·미디움(M)·라지(L) 혹은 44나 55로 구분해 선택하기 편하다. 

쉽게 말해 캐주얼 혹은 디자인 한복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어떻게 이게 한복이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한복은 조선 후기에서 구한말 때 입던 형식입니다. 저고리가 짧고 고름이 크게 달려있고 펑퍼짐 한 느낌이요. 그런데 한복은 시대별로 모양과 느낌이 바뀌면서 내려왔어요. 조선시대 전기에는 소매가 통이 훨씬 크고 저고리 길이도 길어요. 깃도 길고 아래까지 내려옵니다.  저는 21세기, 지금 시대에 맞는 한복을 만들고 있습니다.”

셋째, 현대적이면서 한국적인 감성이 살아있다. 황 대표는 한복을 ‘한국의 역사와 철학이 깃든 옷’이라 표현했다. 구성법(패턴), 색, 문양과 장식을 빼거나 더해 한국의 미(美)를 나타낸다.

“서양은 입체적인 패턴을 중요시하지만 반면 한복은 그렇지 않아요. 흔히 ‘천지인’을 나타낸다고 해요. 한국의 색은 아무것도 염색하지 않은 ‘소색’ 계열이 많아요. 미색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소재에 따라 같은 노랑색이어도 느낌이 다릅니다. 이런 느낌을 좋아하는 해외 분들이 많아요.”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발견하다

손짱은 ‘손재주가 짱’이라는 뜻이다.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부모님이 전주에서 이불집을 해 미싱을 가까이 했다. 옷을 리폼해 입거나 쿠션, 주머니 같은 간단한 재봉 기술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하지만  디자이너나 재봉사처럼 무언가를 만드는 직업을 생각해 본적은 없다. 교복을 줄여 입거나 꾸미는 데 크게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꿈은 공무원이었다. 산림 공무원이 되기 위해 2006년 전북대 산림자원학과에 들어갔다. 안정적인 공무원, 게다가 상대적으로 경쟁률이 낮은 산림직이라면 취직 걱정은 안해도 될 것 같았다. “저희집이 딸 부잣집입니다. 제가 첫째고 여동생이 3명 있어요.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튀는 생각을 안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해서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한복이었다. 만화 동아리 부원이었던 황 대표는 축제 때 한복을 직접 만들어 코스프레 대회에 참여했다. 좋아했던 만화 ‘궁’ 속에 나오는 퓨전 한복이었다.

“‘정말 네가 만든 거냐’며 반응이었어요. 집에 가는 길에서도 사람들이 ‘예쁘다’고 한마디씩 했죠. 이대로 예쁜 한복을 썩히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고 사이트에 올렸더니 3일 만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렇게 처음 만든 한복을 8만원에 팔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깨 너머로 배우고 만든 옷이 제가 살려야 하는 재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한복도 현대에 맞게 만든다면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 생각했다. 창업을 결심했다"고 했다. 틈새시장을 봤다. 직접 디자인한 한복 샘플을 블로그에 올려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의견을 반영해 디자인을 수정하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공부했다. 전자상거래법, 홈페이지 만드는 법, 사진 찍는 법을 독학했다. 

부모님이 동네 이불집을 한 덕분에 원단과 거래처를 구하기 쉬웠다. 멀리 가지 않고 집이나 부모님 가게에서 한복을 만들어 볼 수도 있었다. 중학생이었던 동생 황혜진(26)씨를 모델로 집 거실에서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황씨의 아버지는 큰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길 바랐다.

"아버지는 제가 당신과 같은 '상인'으로 살길 원하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수시로 한복 디자인이 떠오르고 한복일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요."  

2006년 8월 인터넷 쇼핑몰을 열었다. 처음에는 기존 한복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명절이나 파티, 연주회 때 입는 한복이었다. 하지만 ‘세련되고 예쁜 한복’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찾는 사람이 늘었다. 2008년 한달에 700만~800만원 매출이 났다. 한복을 만드는 20대 초반 대학생을 취재하기 위해 방송·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학사를 졸업한 2010년에는 숙명여대 대학원 의류학과에서 한국 복식으로 석사 학위를 땄다.

봄·여름 시즌, 가을·겨울 시즌을 대비해 6개월 전부터 유행하는 디자인과 소재를 파악해 준비하기로 했다. 치수를 재는 맞춤방식이 아니라 기성복처럼 표준 사이즈를 만들었다. 생산, 유통, 마케팅, 브랜딩까지 패션 업계의 방식 그대로를 가져오고 각 분야를 담당할 직원을 뽑았다.

“제품 사진을 찍을 때 도심 속을 걷거나 카페, 음식점에 있는 모습을 담았어요. 한복을 입어도 어색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청년들이 거리낌없이 한복을 입을 거라 봤습니다.”

예상은 적중했다.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서 ‘한복’을 검색하면 일상 한복을 입은 청년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대부분 황 대표가 만든 ‘리슬’ 제품이다. 2014년에는 홈페이지 메뉴를 영어로 만들었다. 해외에서도 한복을 팔기 위해서다.

"수학여행 때 한복을 입고 갔는데 친구와 선생님이 예쁘다고 해서 기분 좋았다는 여고생이 있었어요. '옛날 옷'이라서 튀는 게 아니라, 정말 예뻐서 눈이 간다는 소리를 들을 때 기쁩니다. 제가 처음 생각한 대로 가는 것 같아서요."

◇자신을 특화한 직업을 선택하라 

주요 기업과 유명인에게서 협업, 협찬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 작년 3월 하이트진로가 내놓은 복숭아맛 탄산주 ‘이슬톡톡’의 캐릭터 복순이의 저고리가 대표적이다. 기아자동차 K7, 레이, 쏘렌토에서 영감 받은 한복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각종 SNS에서도 리슬 한복을 입은 청년들을 볼 수 있다.

이룬 성과가 많지만 황 대표는 "아직 멀었다"고 했다. "아직도 한복을 입으면 그냥 '예쁘다'가 아니라, '와 한복이네'라는 반응입니다. 한복을 일상복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할 일이 많아요."

장기적인 로드맵을 짰다. 지금 디자인하는 한복은 1세대. 조선 후기 모습으로 가장 기본적인 높이로 올라오는 치마-짧은 저고리 형태다. 대중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한복의 이미지다.

“지금은 우리 한복 역사가 중간에 끊겼기 때문에 조선 후기 한복 디자인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3세대에서는 간적접, 은유적으로 표현해도 ‘이건 한복’, ‘한국적’이라 느낄 수 있는 옷을 만들고 싶습니다.”

국내 소규모 한복 브랜드는 50여개 정도. 시장이 커지고 한복을 알아주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다. “한복을 빌려 입는 시장은 커진 반면 사서 입으려는 사람은 없어요. 한복업계에서 이 문제는 뜨거운 감자입니다. 80~90% 한복 혼수시장이 위기예요. 한복이 청바지나 블라우스, 셔츠, 맨투맨과 어울리려면 소비시장도 같이 커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