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빅4 회계법인 그만둔 회계사가 입사한 신의 직장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이재은씨
삼정회계법인 회계사 출신
“한국은행 발행 조사·연구서를 꼭 보라”

회계사와 변호사,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 대학생도 붙기 어려운 직장이 있다. 2016년 기준 평균 연봉은 9669만원, 대졸 신입사원 초봉은 4200만원. 신의 직장 ‘한국은행’이다.

작년 하반기 대졸 신입 공채(G5)에 3900명이 몰렸다. 이중 최종 합격 인원은 64명. 이 가운데 약 40명이 이른바 SKY(서울대, 연대, 고대) 출신이다.

작년 12월에 입사한 이재은(26)씨는 서울시립대 세무학과를 나왔다. 2년 동안 공부해 회계사 자격증을 따고 2014년 삼정회계법인에 입사했다. 삼정회계법인은 삼일, 안진, 한영과 함께 국내 회계법인 빅(BIG) 4로 꼽힌다. 삼정회계법인의 평균 연봉은 4693만원(출처 크레딧잡)이다.

하지만 2016년 7월에 삼정회계법인을 나와 한국은행 입사를 준비해 당당히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합격 비법에 대해 들었다.

◇’회계사 자격증 있으니 수월하다’는 생각은 착각 

이씨는 유치원 교사인 어머니와 고등학교 교사인 아버지를 밑에서 자랐다. 고등학생 때부터 ‘자본시장 파수꾼’이라 부르는 회계사를 꿈꿨다. 부모님은 이씨에게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자주 했다.

“30년 넘게 근무했으면 이제 쉬엄쉬엄해도 좋을 텐데, 아버지는 새벽까지 공부하셨어요. 시험기간마다 아버지 입술이 부르텄죠. 아버지는 평교사로 남아 계세요. 학생을 위해 연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만 생각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고 다짐했죠.”

3학년 2학기부터 회계사 공부를 시작해 5개월 만에 1차 시험에 붙었다. 1년 더 공부해 2013년 8월 2차 시험에 통과했다. 삼정회계법인 입사까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막상 다녀 본 회사는 생각과 달랐다. "분위기도 자유롭고 배우는 건 많았지만 공적 업무와는 거리가 좀 있었습니다."

회계법인의 불안전성도 마음에 걸렸다. 금융감독원은 등록 1~5년차 회계사 숫자가 9대 법인 기준으로 2010년 1834명에서 2015년 1751명으로 감소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회계법인의 숫자는 늘어나는데 경기는 불황이어서 급여도 높지 않다. 수습을 뗀 초임 회계사의 연봉은 4000만원을 조금 넘는다. 웬만한 대기업 신입사원 보다 낮은 액수다. 책임자 직급으로 올라서도 억대 연봉은 꿈꾸기 어렵다. 금융감독원이 2014년 기준 공인회계사 합격자의 평균 수험기간은 44.4개월이라고 밝힌 적 있다. 고시 수준으로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대가치곤 높은 수준은 아니다.

"'앞으로 계속 일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안정성, 공공성을 띄는 한국은행으로 이직하기로 했습니다."

회계사 자격증이 있으니 수월하리라 생각했다. 한국은행 경영직렬 필기시험에 나오는 분야는 재무관리, 회계, 경영학 세 가지. 회계사 시험 때 응시하는 과목 중 일부였다. 실무 경험을 쌓았지만 공부를 한지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또 지원자 대부분 회계사와 변호사 자격증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합격을 자신할 수 없었다.

“특히 경영학은 1차 시험 때만 공부해서 많이 잊어버렸어요. 자격증을 따고 바로 지원하는 사람보다 뒤처질 것 같았습니다.”

일주일에 2번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스터디를 했다. 경영, 통계 등 다양한 전공자 5~6명이 모였다. 1시간 동안 문제를 함께 풀었다. 이후 1시간 동안 ‘왜 답이 이럴까’ 추론했다. 정답만 확인하고 넘어가지 않았다. ‘풀이 과정’에 집중했다. 나머지 1시간은 각자 시사상식을 준비해 발표한 후 토론을 했다. 스터디가 끝나면 카페에서 영업이 끝날 때까지 공부했다. 주말에도 규칙적으로 공부했다. 하루 최소 5~6시간 공부했다.

“한국은행 필기시험과 회계사 시험이 유사하긴 합니다. 하지만 회계사 시험은 과목이 방대해서 급하게 보고 넘어갔어요. 한국은행은 논술문제가 나오기 때문에 대충 볼 수 없었습니다. 식만 외우지 않고 도출 과정을 공부했어요.남에게 설명해줄 수 있을 만큼요.”

이씨는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조사·연구서를 꼭 보라’고 조언했다. 한국은행이 무엇에 관심갖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다. “회사에서 일해보니 보고서에 들어가는 문장에 얼마나 공을 많이 들이는지 깨달았어요. ‘이 문장은 왜 들어갔을까’ 유심히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어렵기로 소문난 필기시험

한국은행은 작년 9월 초 원서접수를 시작했다. 자기소개서 문항은 두 가지. 첫째, 지원 동기를 삶과 학업, 중장기 목표를 근거로 밝히고 입행 후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서술하도록 했다(총 1200글자). 둘째, 가치관과 진로에 영향을 미친 경험이나 인물, 책은 무엇인지를 물었다(총 1000글자).

이씨는 첫째 문항에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을 썼다. 한국은행 지원자 중 회계사가 많기 때문에 전문성 보다 ‘협력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적지 않았다. 제한 글자 수가 적고, 면접 때 더 많은 질문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면접에서 나올 질문을 상상하며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 “합격하고 싶은 마음에 과장하거나 거짓말하는 지원자가 많아요. 거짓말을 하면 면접에서 돌발 질문이 나오면 답하기 힘듭니다.” 

둘째 문항에는 시카고미술관에서 본 그림에 대해 썼다. “미술관에는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과정을 전시하는 공간이 있어요. 쇠라의 ‘일요일의 그랑자트’는 한 개씩 점을 찍어 그린 점묘화입니다. 쇠라는 2년 동안 점 모양과 크기를 규칙적으로 찍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런 노력을 배워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금융공기업 가운데 한국은행의 필기시험 난이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1교시에는 3시간 동안 학술 시험을 봤다. 경제·경영·법학·통계·IT 컴퓨터공학 5개 전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약술로 답했다. 이씨가 지원한 경영직렬에서는 한국은행의 외환과 환율정책, 금융리스크 관리, 기업의 재무상황 등 사례 분석 유형이 많다.

2교시에는 1시간 동안 공통 논술을 봤다. 이번에는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변화와 도전에 대해 서술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지문을 참조해 분량 제한 없이 작성하도록 했다. 총 4개 지문이 나왔다. ‘세계경제포럼에서 연초 발표한 4차 산업혁명의 미래 전망’, ’영국에서 자동차 산업이 발달하며 마부들의 일자리가 사라진 문제점’, ‘일본 코닥사가 필름과 디지털 카메라 사이에서 고민할 때 본래 가진 고유 기술을 활용해 신기술에 적용한 사례’, ‘성장의 성과를 전 계층이 공유해야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내용의 영어 지문’이었다. 이씨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미국, 독일, 일본 등은 정부가 주도해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할 정책이나 사회 인식이 부족합니다. 자칫 고용 없는 성장만 가져올 수 있습니다. 고도기술을 활용하는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을 육성해야 합니다.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을 두려워하지 말고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자소서를 작성할 때는 면접을 생각하라

큰 부담을 느꼈던 필기시험을 통과했다.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토론-실무진-임원 면접까지 관문이 남았지만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간절함이 앞섰다. 이번에도 스터디로 대비했다. 이씨는 스터디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스터디만 하면 공부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게 중요해요.”

토론 주제로 ‘세계 경제 불안요소 중 우리나라 금융기관에 미칠 영향, 정책당국에서 할 수 있는 대응방안’이 나왔다. 1시간 동안 8명이 돌아가며 의견을 말했다.  “미 대선날 토론 면접을 봤어요. 세계 경제 불안요소 중 ‘트럼프 당선’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부분 힐러리를 예측하는데 혹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면 정치와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진다고요. 한미FTA를 충분한 논의 없이 날림으로 재협상할 수 있죠. 중국과 무역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면접을 끝내고 나오니까 트럼프가 당선돼 당황했죠.”

한국은행은 실무진 면접을 2차례 나눠 진행했다. 차장급 면접관 6명이 방을 나눠 3명씩 들어갔다. 지원자 한명이 첫번째 방에서 면접을 보고 다음방으로 이동해 면접을 한번 더 봤다. 면접관은 자기소개서에 나온 내용을 한번 더 물었다.

“질문은 어렵지 않았어요. 대신 답변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여행을 가면 미술관에 꼭 들른다고 말했어요. 그러면 ‘여행은 몇번 다녀왔는지’,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인지’ 등을 물었습니다. 거짓말을 했다면 쉽게 막힐 만한 질문들이었죠.”

마지막 면접에는 장병화 부총재를 비롯해 임원 6명이 면접관으로 들어왔다. 함께 면접을 본 지원자 4명 중 경력이 있는 지원자가 이씨 말고도 3명이 더 있었다. 이씨는 ‘실무 경험으로는 차별성이 없겠다’고 판단했다. 40분 동안 진행했지만 지원자가 5명이어서 질문은 4~5개에 그쳤다. 다른 지원자에 비해 눈에 띄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하지는 않았다. 이씨는 최종 합격 명단 64명에 이름을 올렸다. 

사회생활을 해봤지만 배울 게 많다. “한국은행이 실시하는 통화 정책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더 많이 공부하고 신경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요. 선배에게 많이 묻고 배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