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 미술 전공→평균연봉 1억 美 '꿈의 기업' 취업기

2015년 단 1명만 채용한 블러 스튜디오에 입사   
지방대 나와 평균연봉 1억 회사로
해외취업은 실력만으로 판가름…지나친 환상은 금물

영화 '데드풀'과 '아바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생물체가 마치 실제 사람처럼 느껴진다. 화면에 다가가 만지면 사람의 감촉이 느껴질 것만 같을 정도로 실제 인간과 흡사하다. 요즘 영화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3D 영상이다. 

이 두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3D 영상 제작을 의뢰한 곳이 같다는 것. 세계적인 영상 제작업체인 '블러 스튜디오'다. 1995년 설립, 22년째를 맞은 이 회사는 3D 영상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다. 게임 시네마틱 트레일러(게임의 캐릭터를 이용해 수분가량의 짧은 영상을 만든 것) 제작으로도 유명하다. 디즈니와 폭스, 소니픽쳐스 등 영화 제작사뿐만 아니라 애플, EA 등도 블러 스튜디오의 고객이다. 

블러 스튜디오는'소수 정예'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전체 직원이 100여명뿐이다.  철저하게 경력 위주로 인원을 선발하기 때문에 신입 사원은 거의 채용하지 않는다. 대신 평균연봉 1억(출처: 미국 Glassdoor)으로 업계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세계적인 고객 회사들의 주문이 항상 끊이질 않기 때문에 동종 업계의 다른 기업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단기간에 쌓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이런 '꿈의 기업'에 당당히 신입으로 입사한 한국인이 있다. 2015년 블러 스튜디오에 채용된 김경수(34)씨가 그 주인공. 전세계를 대상으로 직원을 뽑는 블러 스튜디오가 그해에 유일하게 뽑은 1명이 바로 김씨였다. 지방대 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美 명문대 출신도 뚫기 어려운 회사에 당시 32살의 나이로 입사했다.  초봉은 7000만원 남짓이었다. 3년째 '3D 캐릭터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이 회사에 단 8명뿐인 캐릭터팀에 소속돼 있다.

◇안정적인 교사의 길 접고 모험 택한 20대

김경수씨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며 블러 스튜디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동료들과 함께 최근 제작한 '타이탄 폴 2' 영상은 2017년 'VES(Visual Effects Society, 시각 효과 전문가 조직) 어워즈'  광고분야 시각효과상 부문 후보에 올랐다. VES 어워즈는 '영상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상이다. 시상식은 미국 캘리포니아 비버리힐즈에서 2월 7일(현지시각) 열린다.

<타이탄폴 2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EXwdWuSuiYA

-3D 캐릭터 아티스트란 무엇인가요

"용어는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설명만 들으면 무릎을 탁 치며 '아 그거였구나~'할 정도로 다 아는 직업이에요.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생물이잖아요. 컴퓨터를 이용해 그런 캐릭터를 실제 존재하는 듯한 느낌의 3D 입체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 제 일이에요.

컴퓨터에서 조각을 하는 셈이죠. 로보트나 자동차, 건물을 주로 만드는 분도 있고 사람·괴물 등 생명체를 주로 만드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입니다."

김씨는 대전에 있는 목원대 미술교육과를 전공했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였다. 그러나 미술로는 생계가 어렵다는 이유로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타협한 전공이 나중에 선생님도 할 수 있는 미술교육과였다. 부모님과 얘기해서 미술교육과를 간다는 조건으로 계속 미술을 하기로 했다. 성적에 맞춰가다보니 원래 집인 인천에서 거리가 있는 목원대에 진학했다.

-전공에 따라 선생님을 할 수 있었을텐데요

"적성이 맞지 않더군요. 한 번은 교생 실습을 나갔는데 상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단순히 미술을 가르치는게 전부가 아니더라고요. 선생님이란 직업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인격체를 함께 만들어나가야 하는 사명감과 책임감이 부여되는 자리였습니다.

결국 선생님이 되겠다는 생각을 접었습니다. 대신 졸업 이후에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직업을 찾다 전시기획사에 입사했습니다. 거기서 3년 정도 일했죠. 전시 기획자에다가 큐레이터 역할까지 겸했어요. 작가 섭외, 작품 큐레이팅 등이 주 업무였죠. 재미는 있었지만 제 스스로는 발전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충동적으로 유학을 결심했죠."

◇ 하루의 절반을 모두 꿈을 위해 쏟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김씨는 일단 미술 공부를 더 해보자는 목표를 세웠다. 국내보다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해외에 가본 경험이라고는 어릴 적 일본 여행이 전부인 김씨는 '디즈니나 유니버설 스튜디오 같은 유명한 회사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영상 관련 학과를 검색했다. 그 과정에서 찾은 곳이 바로 '아카데미 오브 아트 유니버시티(AAU)'.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학원이다.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유명한 대학원인데다 학교 근처에 픽사 스튜디오가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입학 준비는 어떻게 했나요

"유학원 같은 기관의 도움은 받지 않았어요. 혼자서 입학 준비를 했죠. 대학원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메일 주소로 자기소개와 포트폴리오를 보냈습니다. 서류에 합격했다는 답신이 왔더군요. 별도의 면접없이 바로 입학하라는 내용도 함께 있었습니다. 2012년 6월 본격적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서류만 합격하면 입학을 한다고요?

"미국에선 학벌·자격증 등 '스펙'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실력 하나만을 봅니다. 작품을 보고 실력있다고 판단하면 입학을 허가하는거죠.

저 같은 경우엔 포트폴리오로 실력을 입증했어요. 대학교 졸업 작품과 평소에 틈틈이 작업한 드로잉을 포트폴리오로 만든 겁니다."
 
-언어 문제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제가 워낙 영어를 못해요. 자기소개서를 만들 때도 아는 친구가 번역을 해줬어요. 웃지 못할 일도 많았습니다.

입학이 결정된 이후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국에 갔어요. 그런데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여권 심사 때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한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무사히 통과했는데 저는 따로 불려나가 쩔쩔매기도 했습니다. 혼자 미국에 온 사람이 영어도 제대로 못하니 당연한 결과였죠.

전공 공부도 영어로 해야하니까 정말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요. 한국어로 배워도 어려운 내용이니까요. 일단 영어부터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에 1년차 때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직접 부딪히며 영어를 배우자는 생각이었죠. 그러더니 조금씩 영어가 들렸습니다."

- 금전 부담도 만만치 않을텐데요

"대학원 학비가 1년에 2000만원 정도였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물가가 살인적이다보니 월세도 엄청 비쌌어요. 학교 근처는 월세 200만원 수준인데 도저히 감당이 안됐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차로 40분 정도 거리인 곳에 집을 구했어요. 거기는 월세가 70만원이었습니다.

직장 생활 때 모은 돈을  대학원 다닐 때 다 썼어요. 하지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학문적인 성취를 그때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대학원에선 뭘 배웠나요

"시각적 특수효과(VFX·Visual Effects)에 대해 주로 배웠어요. 우리가 아는 CG(Computer Graphics·컴퓨터 그래픽)가 이 범주에 속합니다. 존재할 수 없는 영상이나 촬영 불가능한 장면을 컴퓨터를 통해 만들어내는 디지털 기법입니다.

VFX를 대학원에서 처음 배웠어요. 하루에 12시간씩 작업실에서 공부만 했습니다. 덕분에 실력도 계속 늘었죠. 매년 대학원 내부에서 열리는 전시회 3D 모델링 부문에서 1~2등을 했어요."

◇블러 스튜디오 사로잡은 1분의 마법

미국 LA에선 매년 VFX 분야의 회사들이 한군데 모이는 채용 박람회가 열린다. 대학원 졸업을 앞둔 2015년 여름 김씨에게는 황금같은 기회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떠나 3박4일 동안 박람회에 참석했다.

-블러 스튜디오는 어떻게 들어갔나요

"박람회 당시에 생각보다 유명한 회사들이 부스를 많이 차리지 않았더라고요. 체념한 상태였는데 친구가 '블러 스튜디오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 지나가던데?'라고 하더군요. 너무 기뻐서 박람회장 곳곳을 뒤졌는데 결국 그날은 찾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아침부터 친구가 목격했다는 장소에서 하루종일 기다렸습니다. 한참 기다렸는데 오후에 블러 스튜디오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보이더군요. 바로 달려가서 말을 걸었습니다. 그분들은 명함을 주면서 지나가는 말로 '홈페이지 통해 지원하라'고 했어요."

-낙담했겠네요

"1분만 달라고 사정한 뒤 아이패드에 담겨있는 포트폴리오를 보여줬죠. 대학원 다닐때 틈틈이 작업한 작품들이었어요. 가령 맷 데이먼을 로보트로 형상화한 3D 캐릭터도 있었습니다.

순간 보는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떤 소프트웨어를 썼는지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물어보더군요. 그러더니 가방에서 새로운 명함을 꺼내더라고요. 명함에 써 있는 이메일로 연락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포트폴리오를 첨부한 자기소개서를 메일로 보냈다. 다음 날 아침 답장이  와 있었다. ‘시간되면 우리 스튜디오에 놀러오라’는 내용이었다. LA에 있는 블러 스튜디오에 가서 면접을 봤다. 입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말로만 듣던 회사에 간다는 것 자체가 설레는 일이었다.
 
면접관으로 3명의 간부가 들어왔다. 알고보니 그 3명 중 한 명이 박람회장에서 만났던 사람이었다. HR(인사관리) 최고책임자였던 것. 면접은 간단히 대화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사소한 일상 혹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게임 좋아해?' '샌프란시스코 날씨는 어때?' '작품은 어떻게 만들었어?' 등이었다. 대화가 끝난 후 "너를 채용할 것"이라는 입사 제안을 받았다. 처음엔 갑작스러워 당황했다. 하지만 알고보니 박람회 현장에서의 패기넘치던 모습이 채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었다.

-바로 일을 시작한건가요

"바로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고 하더군요. 대학원 한 학기가 남은 상황이었어요. 면접관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니 오히려 당황하더라고요. 분명 학력을 적었는데 전혀 보지 않았던 겁니다. 정말 실력과 작품만 봤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과는 완전히 달랐죠."

아직 대학원을 마치지 않았던 김씨는 일단 6개월간은 인턴으로 근무했다. 샌프란시스코와 LA까지 비행기로 출퇴근했다. 그러다 2015년 12월 졸업 이후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거처도 LA로 옮겼다. 

◇자유롭지만 책임도 명확한 근무환경

-근무 시간은요

"정해진 출퇴근 시간은 없습니다. 언제든 하루에 8시간의 근무시간을 채우면 됩니다. 직원마다 출퇴근 시각이 제각각입니다. 자신의 근무만 끝나면 언제든 퇴근이 가능합니다. 퇴근할 때 다른 사람이 남아 있어도 전혀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서로 일에 간섭하는 법도 없습니다.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죠. 그러나 자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1년에 두 차례 정도 성과 평가를 합니다. 여기서 성과를 내지 못한 직원은 가차 없이 해고됩니다.

한국과는 정반대죠. 한국에서는 일을 못한다는 이유로 해고되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그러나 이곳에선 자유에 취해 해야할 일을 하지 않으면 실업자 신세가 됩니다."

-일은 재밌나요

"일이 너무 즐겁습니다.  사무실이 아닌 곳에서도 일상의 모든 것을 일과 연결시킬 정도예요. 여행갈 때나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고요.

해외취업 특성상 힘든 부분도 분명 있어요. 가족을 떠나 혼자 외국에 살아야 하잖아요. 아직 결혼도 안 했으니 더욱 외로움이 크죠. 언어적인 장벽도 존재하고요. 아직 배워나가는 단계입니다."

-뭘 더 배우나요

"미술해부학을 틈틈이 공부합니다. 골격과 근육 등을 자세히 그리는 인체 드로잉도 많이 합니다. 상상 속의 캐릭터를 실제 인물처럼 표현하려면 디테일이 중요하니까요."

-해외 취업을 하고 싶은 이에게 조언해주세요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 해외에서 특정 업계의 상위권 회사에 취업할 확률은 10%도 안 됩니다. 외국 사람을 많이 뽑지 않는게 현실이죠. 제 경우엔 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고요.

하지만 해외 취업은 모든 것이 실력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이 매력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차별화된 나만의 능력을 갖고 있다면 보상이 따라오니까요.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학벌 스펙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막연한 환상은 금물입니다. 한국에서 취업이 안 된다고 무작정 해외로 올 경우엔 더 큰 좌절을 맛볼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뭔지, 그걸 할 의지는 충분한 지에 대해 고민하고 도전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