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름을 써야 고위 공무원이 된다"는 이 사람 직업은?

2003년 상훈과 필경사로 입사
현재 '3대 필경사'로 근무
손 글씨로 공무원 임명장 써줘

5급 공무원부터 국무총리까지 해마다 7000명에게 임명장 써주는 남자가 있다. 인사혁신처 심사임용과 김이중 사무관이 주인공이다. 그의 직업은 ‘필경사(筆耕士)’. 붓 필(筆), 밭갈 경 (耕), 선비 사 (士). 글씨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필경생(筆耕生)이나 필경공(筆耕工)이라고도 한다.

대통령을 대신해 붓글씨로 임명장을 써주는 정부 소속 공무원이다. 1962년 1대 정태룡 전 사무관을 시작으로, 김 사무관이 2008년부터 3대 필경사를 맡고 있다. 그가 이름을 써줘야 고급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예전엔 장·차관급만 손으로 임명장을 썼다. 그러나 2009년부터는 5급 공무원 임명장도 그가 손으로 쓴다. 1년에 쓰는 임명장은 7000장에 이른다. 3평도 채 되지 않는 좁은 사무실 안에서 툭하면 야근하는 이유다.

◇ “달인이요? 어휴 한참 멀었습니다”

- 하루에 몇 장이나 쓰세요?
30장 정도 작성합니다. 한 장 쓰는 데 15분 정도 걸립니다. 요즘 같은 연말에는 특진이 많아 60~70장까지 씁니다.

- 양이 많아 보이는데요
이전보다 2배 이상이에요. 지난 정부 때 사기진작 차원에서 5급 공무원도 손으로 쓴 임명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 글씨 연습은 계속하시나요?
당연하죠. 아직도 글씨에 만족 못 해요. 필경사들이 평생 먹을 갈아도 벼루 하나를 다 못 써요. 추사 김정희는 먹을 갈다가 벼루를 몇 개씩 뚫었다고 하잖아요. 벼루에 구멍 뚫는 날이 오면 달인으로 불릴 수 있지 않을까요.

- 같은 일을 반복하면 지칠 때도 있을 것 같은데요
항상 생각하는 게 있어요. 돈 벌기 위해 글씨 쓰는 사람이 되지 말자고요. 5급 이상 임명장은 평생 한 번 받는 사람이 많아요. 최고의 순간을 함께하는 만큼 정성껏 만들자고 다짐합니다.

- 그럼 글씨를 잘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있나요?
마음을 편히 갖는 게 중요합니다. '틀리면 안 되는데' 하며 글씨를 쓰면 오히려 집중력이 흐트러져 잘 안 써지더라고요.

◇ “손 글씨가 국새를 더 빛나게 해요”

- 인쇄 글씨와 어떤 차이가 있나요?
보존성이죠. 보통 임명장은 책 사이에 껴 놓거나 앨범에 보관하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인쇄 글씨는 지워지거나 떨어집니다. 반면 직접 쓴 글씨는 변함이 없습니다. 가치의 차이도 빼놓을 수 없어요. 임명장에는 국새가 찍혀 나갑니다. 인쇄 글씨보다는 손으로 쓴 글씨 위에 찍힌 국새가 더 빛나지 않을까요.

- 그럼 국새도 직접 찍으시나요?
아니요. 국새 찍는 작업을 하는 분이 따로 있어요. 제가 임명장을 완성하면 각 부처 담당자에게 확인을 받아요. 문제가 없으면 저와 담당자가 함께 국새를 찍으러 갑니다.

◇ 군대 선임 ‘훈장증 ’보고 필경사 알아

- ‘필경사’ 직무를 알고 계셨나요?
군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모필 병(붓글씨 병)’이었어요. 계명대학교에서 서예학을 전공했어요. 어느 날 선임하사가 훈장증을 들고 왔는데 빨간 국새가 크게 찍힌 게 멋있어 보였습니다. 저 글씨를 누가 썼을까 궁금해하다 필경사란 직업을 알았습니다.

- 왜 지원하셨나요?
전통을 잇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손으로 쓴 임명장에 국새를 찍는 건 한국·중국·일본에만 있는 전통이에요. 인주 문화라고 합니다.

- 당시 채용과정은 어떠했나요?
주어진 시간 안에 임명장을 똑같이 작성했습니다. 한 글자씩 써 내려 갈 때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습니다. 서예학과 특별 채용이었는데 경쟁률은 9대 1이었어요. 당시 다니던 직장은 그만두고 학교 추천을 받아 지원했습니다. 이렇게 일하고 있는 거 보면 제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 앞으로 계획은?
더 잘 쓴 임명장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사람들이 손 글씨에 애착을 가졌으면 합니다. 요즘은 키보드에 익숙해져 자기 글씨를 잊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