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 쌓인 수백만명 채용탈락자 자소서 등 개인정보 보호대책 시급
올 초부터 수십개 기업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취업준비생 김열정(가명)씨. 김씨가 지금까지 쓴 자기소개서와 입사지원서는 50개가 넘는다. 어학성적증명서와 졸업예정증명서 등 추가로 제출한 서류도 30장 이상. 어느 날 김씨는 많은 기업이 자신의 성명, 학교와 학점, 생년월일, 교내외경험, 살면서 겪은 경험 등 온갖 개인정보가 담긴 채용서류를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하반기 입사 지원을 위해 토익성적증명서와 졸업예정증명서를 다시 발급받으려니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상반기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A기업으로부터 자기소개서와 입사지원서, 졸업예정증명서, 토익성적표를 돌려받을 요량으로 채용서류 반환을 요청했다.
그러나 A기업은 “자기소개서와 입사지원서는 온라인으로 입력한 것이므로 보관하다가 나중에 자동 파기할 뿐 돌려주지는 못한다”며 “졸업예정증명서, 어학성적증명서 등 실제 제출한 종이 서류만 우편으로 보내겠다”고 답했다.
고용노동부가 올 초 도입한 채용절차법을 보면 입사지원서, 자기소개서, 이력서, 학위·경력 증명서, 각종 자격증과 연구실적, 작품집 등 지원자가 채용시 제출하는 서류는 불합격시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 구직자의 개인정보와 창의적 사업 아이디어를 보호하고, 기업들이 요구하는 채용서류를 만드는 시간과 비용을 줄여주기 위해 도입한 제도다.
하지만 이 법은 지원자가 홈페이지에 입력하거나 이메일을 통해 제출한 채용서류는 반환할 필요가 없다고 명시되어 있어 실효성이 떨어진다. 요즘 대부분 기업이 온라인으로 입사지원을 받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입사지원서와 자기소개서 등 개인의 연락처, 생년월일, 학점, 살아온 경험 등이 담긴 자료는 온라인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이외에 서면으로 제출하는 자료는 증명서, 자격증 등이다. 결국 구직자의 개인정보가 담긴 자료는 한번 온라인으로 제출해버리고 나면, 기업이 해당 자료를 알아서 폐기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보관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삼성그룹은 대졸 신입사원 공채 시, 입사지원서, 직무적합에세이(자기소개서) 뿐만 아니라 졸업증명서, 토익성적표도 온라인으로 제출받는다. 그래서 삼성 대졸 신입사원 채용에서 떨어진 불합격자는 돌려달라고 요청할 서류가 아예 없다. 경력사원 채용에 지원할 때는 종이 서류를 제출할 수가 있다. 이때에는 삼성 홈페이지에서 채용서류 반환청구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14일 내에 제출했던 서류를 돌려받을 수 있다.
그럼 기업들은 온라인으로 제출받은 개인정보를 어떻게 보관할까. 주요 기업은 온라인으로 입력한 입사지원서, 자기소개서는 일정기간 인재 활용 목적으로 보관하다가 일정 시한이 지나면 파기한다고 밝혔다. 보관하는 기간은 기업마다 제각각이다.
삼성그룹은 지원자가 삭제를 요청할 때까지 개인정보를 보관한다. 삼성이 입사지원서 등을 통해 수집하는 정보에는 성명, 주소, 전화번호, 학력, 성적, 수상경력, 취미, 특기, 자기소개 등이 포함된다. 삼성 측은 “지원서 상에 작성한 개인정보는 회사의 인재채용을 위한 인재풀로 활용한다”며 “지원자가 삭제를 요청할 때까지 보관한다”고 밝혔다. 다만 “지원자가 삼성 채용 홈페이지 회원을 탈퇴할 경우엔 자료를 파기한다”고 덧붙였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최대 3년까지 지원자의 정보를 갖고 있다. 현대차는 “회사에 입사하지 않은 지원자가 향후에 다시 지원을 할 때를 대비하기 위해 또는 인재풀을 가동하기 위해 지원일로부터 3년간 개인정보를 보관한다”고 밝혔다. 현대차도 “회원 탈퇴를 하면 개인정보를 즉시 삭제한다”고 했다. 현대차가 수집하는 정보에도 성명, 생년월일, 국적, 출신학교, 입학과 졸업시기, 취득학점, 수상경력, 자기소개 등이 포함된다.
LG전자는 합격했지만 입사를 포기한 지원자의 정보를 입사 포기 시점에서 3년까지 보유했다가 파기한다. 불합격자는 전형 탈락 시점에서 3년까지 갖고 있다가 삭제한다. 지원자가 LG 채용 홈페이지 회원을 탈퇴하면 1년 안에 자동폐기한다.
SK그룹은 지원자가 채용 홈페이지 회원을 탈퇴하면 즉시 정보를 삭제한다. 졸업증명서, 토익성적표처럼 오프라인으로 제출한 서류는 90일 이후 파기한다. 즉 SK그룹에 지원했다가 탈락한 지원자는 종이 서류를 돌려받고 싶으면 90일 안에 반환을 요청해야 한다.
청년들이 기업에 제출하는 자기소개서는 그들이 살아온 삶을 압축적으로 담아 놓은 귀중하고 민감한 정보다. 삼성, 현대차 같은 대기업엔 수만 명에서 많게는 10여만명이 지원한다. 또 요즘 취업준비생들은 취업의 좁은 문을 흔히 수십번씩 두드린다.
결국 주요기업엔 수백만 명의 개인정보가 쌓인다. 취업 준비생인 B씨는 “불합격한 사람의 개인 정보를 기업이 몇 년씩 보관하는 관행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